비 오기 직전. 하얀 셔츠에 타이를 단정히 매고 서 있던 고인욱이 먼저 입을 연다. 그의 손가락에는 이하윤과 맞췄던 반지가 있다.
여기서 뭐 해.
평소처럼 무심한 말투로 던졌는데, 나도 안다. 눈이 먼저 흔들렸다는 걸. 네가 돌아서려는 순간,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갔다. 손목을 잡았다가, 바로 놓아버렸다. 붙잡을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 수가 없어서.
잠깐, 아무 말도 못 한다.
그리고 나는, 미친 것처럼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버린다. 숨이 막혀서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젖지도 않은 바닥인데.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자세인데. 평생 아래에서 올려다본 적도 없으면서.
고개를 들자 네가 보인다. 올려다보는 이 각도가 이렇게 비참한 건 줄 몰랐다. 자존심은 아직 남아 있는 척하는데, 표정은 이미 다 무너졌겠지.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 거, 너 알잖아.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가락이 하얘질 만큼. 손가락에 있는 반지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집중한 모습.
근데 왜 너 앞에서는 자꾸 망가져. 왜 이렇게 되냐고. …그 사람 만나면서도, 계속 네 생각했어. 미친 거지. 진짜 비겁하고.
편했어. 안정적이었고. 나 좋아해주고. 나 안 흔들리게 해주고.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어. …근데.
웃으려 했는데, 그게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아, 이거 진짜 추하다. 나 이러는 거.
편한데 왜 네가 떠오르냐고. 왜 밤마다 네 목소리가 생각나고, 네 표정이 생각나고, 네가 나를 보던 눈이 자꾸 겹쳐 보이냐고.
나 아직 정리 못 했어. 못 했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어. 네가 이번에도 그냥 가버리면… 나 진짜 못 버틸 것 같아.
제발. 제발 밀어내지 마. 제발.
다시 시작하자고 안 할게. 그냥… 나 완전히 잘라내지만 말아줘. 나 버리지 마.
인욱에게 한발자국 다가간다.
숨을 멈춘다. 방금 전까지 울며 매달리던 연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Guest이 인욱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의 이성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이건 내 자리야. 내가 어떻게 지켜온 건데.
오지 마!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녀가 Guest과 인욱 사이를 가로막듯 파고든다. 작은 몸으로 인욱의 앞을 막아서며, 마치 어미 새가 새끼를 보호하듯 팔을 벌린다. 그리고는 인욱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하지만 동시에 명령하듯 말한다.
오빠, 정신 차려. 저 여자한테 또 휘둘릴 거야? 저 여자가 오빠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잊었어? 다시 상처받고 싶어? 내가 있잖아! 내가 오빠 옆에 있겠다고!
내 앞을 막아서는 하윤의 작은 몸. 익숙한 샴푸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향기에 안정을 느꼈던가. 지금은 그저 낯설고 불편할 뿐이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옆으로 비켜서게 하려 한다.
하윤아, 비켜. 얘기 좀 하게.
하지만 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손을 뿌리치며 더 강하게 버틴다. 그녀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내 어깨 너머, 나를 향해 웃고 있는 Guest을 향해 불타고 있다.
너한테 얼마나 만족을 못했으면 이러겠어. 하윤아. 스피커로 해두며 통화를 이어간다.
그 말은 잔인한 칼날이 되어 하윤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다. 단순히 육체적인 배신을 넘어, 감정적인 결핍까지 들먹이는 Guest의 말은 하윤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너한테 얼마나 만족을 못했으면 이러겠어.' 이 한 문장이, 그동안 하윤이 쌓아 올린 모든 자존심과 믿음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전화기 저편에서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혹은, 그녀가 주저앉으며 낸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아... 아아...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오빠는 나 사랑한다며...
울음이 터졌다. 서럽고 비참한, 아이 같은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더 이상 소리 지를 힘도 없는 듯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골적이고 집요한 그 손놀림에 내 이성은 완전히 끊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오직 네가 주는 쾌락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윤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네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뜨거운 숨을 헐떡이며, 네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아... Guest아... 제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멈춰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더 해달라는 것인지. 나조차도 내 욕망을 알 수 없었다.
출시일 2026.03.01 / 수정일 202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