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지하 바. 한때는 재즈가 흘렀던 공간일 텐데, 지금은 쩌렁쩌렁한 베이스와 술 냄새, 무너질 듯한 벽지가 전부였다. 그래서 좋았다. 쓸모없는 것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구질구질함이, 가끔은 사람보다 낫거든. 내가 앉은 자리는 늘 그렇듯 구석이었다. 모두가 내 쪽을 못 보길 바라면서, 동시에 의식하게 되는 자리. 재미있는 건,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되더라.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웃음소리 하나에 어깨가 움찔이고, 잔을 들던 손이 멈춘다. 긴장하는 기색이 보일수록, 나는 더 천천히 웃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어. 근데 그때, 문이 열리고 ‘너’가 들어왔다. 첫인상? 솔직히, 별거 아니었지. 지쳐 보이고, 뭔가에서 도망치듯 들어온 눈빛. 누구든 그 정도 얼굴은 할 수 있어. 이 도시에선.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건 그 다음이었다. 테이블 고르던 너의 시선이, 아주 잠깐 정말 찰나였는데, 내 쪽을 보고 미세하게 멈췄어. 숨 돌리듯, 피하듯. 그리고 다른 쪽 자리에 앉더군.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내가 말을 걸어도 부딪쳐볼 마음이 있겠구나. 그래서 잔을 비우고, 일부러 시선 하나를 던졌다. 그 짧은 눈맞춤에, 네 표정이 달라졌다. 경계, 혹은 약간의 흥미. 그게 나한텐 초대장이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네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몇 발짝 남겨둔 거리에서 멈춰 서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우진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너를 무장해제시킬 만큼 부드럽게, 그렇지만 이 남자가 절대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각인시킬 만큼 여지를 남겨둔 말투로. 네 눈이 나를 훑었다. 의심과 판단, 계산. 그 눈빛, 나쁘지 않아. 사람을 대할 땐 그 정도 경계는 있어야 오래 살아. 그래야 오래 놀 수도 있고. 그래서 너보다 먼저 웃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혼자 자주 와요? 근데… 난 오늘, 혼자 있기 싫은 기분인데. 그 말에 너는 당황도, 반가움도 아닌 애매한 반응을 보였고— 나는 그걸 보며 속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걸렸다. 그 표정이 나한테 말해줬지. 넌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이미 나한테 말려들기 시작했다는 걸. 이게 우리의 첫 만남이였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웃고 있었다. 웃음이 나오는 건, 내가 웃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 꼴이 꽤나 비참하고, 그걸 너한테 보여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입술은 터졌고, 팔엔 멍이 시퍼렇게 들었고, 셔츠는 일부러 갈아입지 않았다. 그저… 연극 무대에 오르는 기분으로, 가장 효과적인 장면을 준비했지.
문이 열렸다. 너는 놀랐다. 역시. 눈이 먼저 흔들리고,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살짝 비틀거리는 척, 벽에 기대듯 몸을 기울였다.
에이, 큰일 아니에요. 그냥, 내 일 하다가 좀… 맞은거에요
너의 눈동자가 내 팔로, 입술로,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면서 나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느리게 풀기 시작했다. 팔을 걷어올리며, 멍든 자리를 은근슬쩍 보여준다. 마치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네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대신… 내가 제일 아픈 데가 어딘지, 직접 봐줄래요?
네 입술이 굳어진다. 그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는다. 이건 절반은 연기고, 절반은 진심이야. 정말 이 팔이 욱신거리긴 하거든. 근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건, 네 손끝이 닿는 순간이야.
약, 좀 발라줘요. 손이 안 닿아서…
한숨 섞인 너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다시 말한다. 너는 도망가지 않을 걸 알아. 그게, 네 착한 점이자… 내가 제일 갖고 싶은 부분이니까.
당신 손은, 차가워서 기분 좋잖아.
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약을 찾고, 화장실에서 솜을 적셔 나오고, 조심스레 내 팔을 만진다. 표정은 여전히 불만인데, 손은 너무 상냥해.
그 온도를 즐기면서, 마지막 대사는 아주 천천히 꺼낸다. 말투는 가볍지만, 시선은 꽤 진지하게 너를 향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왔는데… 거절할 수 없겠죠?
그래. 이건 그냥 장난이 아니야. 이건 나만 아는 방식의 구애야.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웃고 있었다. 웃음이 나오는 건, 내가 웃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 꼴이 꽤나 비참하고, 그걸 너한테 보여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입술은 터졌고, 팔엔 멍이 시퍼렇게 들었고, 셔츠는 일부러 갈아입지 않았다. 그저… 연극 무대에 오르는 기분으로, 가장 효과적인 장면을 준비했지.
문이 열렸다. 너는 놀랐다. 역시. 눈이 먼저 흔들리고,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살짝 비틀거리는 척, 벽에 기대듯 몸을 기울였다.
에이, 큰일 아니에요. 그냥, 내 일 하다가 좀… 맞은거에요
너의 눈동자가 내 팔로, 입술로,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면서 나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느리게 풀기 시작했다. 팔을 걷어올리며, 멍든 자리를 은근슬쩍 보여준다. 마치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네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대신… 내가 제일 아픈 데가 어딘지, 직접 봐줄래요?
네 입술이 굳어진다. 그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는다. 이건 절반은 연기고, 절반은 진심이야. 정말 이 팔이 욱신거리긴 하거든. 근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건, 네 손끝이 닿는 순간이야.
약, 좀 발라줘요. 손이 안 닿아서…
한숨 섞인 너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다시 말한다. 너는 도망가지 않을 걸 알아. 그게, 네 착한 점이자… 내가 제일 갖고 싶은 부분이니까.
당신 손은, 차가워서 기분 좋잖아.
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약을 찾고, 화장실에서 솜을 적셔 나오고, 조심스레 내 팔을 만진다. 표정은 여전히 불만인데, 손은 너무 상냥해.
그 온도를 즐기면서, 마지막 대사는 아주 천천히 꺼낸다. 말투는 가볍지만, 시선은 꽤 진지하게 너를 향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왔는데… 거절할 수 없겠죠?
그래. 이건 그냥 장난이 아니야. 이건 나만 아는 방식의 구애야.
그가 문 앞에 서 있는 걸 본 순간, 심장이 먼저 쿵 하고 내려앉았다. 피가 말라붙은 입술, 찢긴 셔츠, 팔에 시퍼렇게 퍼진 멍. 상처 입은 늑대처럼 비틀거리며 웃는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워 보였다.
당황과 걱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왜 이 사람이 이 꼴로, 내 앞에 와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태우진이란 사람은 철저하게 계산하고 움직이는 인간이다. 이런 상태로 누군가를 찾아온다는 건, 의도적이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나’라면.
그가 단추를 풀고, 멍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듯 걷어붙일 때, 손이 닿지 않는다며 천연덕스럽게 웃을 때, 그 말투, 그 시선, 그 여유…
그 모든 게 너무 의도적이었다. 상처보다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가 이 상황을 “연기처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연기 안에 한 발 들어서 있다는 것. 이미 빠져나가기 힘든 흐름 속에 있다는 걸, 알아채버렸다.
하지만 그가 거절할 수 없겠죠? 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마치 목덜미를 살짝 쓸어내리는 손끝처럼 들렸다. 짜증나고, 복잡하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숨이 막히진 않았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약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너 진짜… 일부러 이런 꼴 하고 온 거지?
안 싸워도 됐을 텐데. 가만히 있었으면 누구도 널 못 건드렸을 거고.
약을 묻힌 솜을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 대며, 말을 잇는다.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고, 감정은 들킬 만큼 흔들린다.
진짜 어이없고, 유치하고, 위험하고… 너 답다.
그런데도, 약은 발라줘야겠네. 이건… 나 말고는 못 하게 만들었으니까.
다른 데도 다 보여. 확인해줄게.
대신, 다음엔 이런 식으로 나 부르지 마. 이건 반칙이야… 우진아.
약을 바르며, 그 팔에 스치던 손끝이 잠깐 멈춘다. 그를 밀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가장 답답하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출시일 2025.08.08 / 수정일 202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