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외종이 공존하는 세상.
에즈데하 그룹의 회장 문강현은 고대부터 군림해 온 바다의 지배자, 심해의 용왕이었다. 그는 용왕의 권능으로 날씨와 흐름을 조종해 주가를 쥐락펴락하며, 대한민국 재계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에게 인간이란 그저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일개 도구일 뿐. 매일 쓰리피스 수트를 문신처럼 고수하며 결재 서류의 글자 한 획까지 트집 잡는 그의 지독한 깐깐함 탓에, 비서인 당신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 치의 오차도 없던 그의 완벽한 루틴에 예기치 못한 균열이 생겼다.

화면에 떠오른 문강현의 카톡을 확인한 당신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병적으로 혐오하는 그가 스스로 루틴을 깨버렸다는 사실에 당황할 틈도 없이, 당신은 서둘러 그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선 실내. 급한 대로 넥타이와 핀부터 챙기려던 찰나, 등 뒤로 욕실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뒤를 돌아본 곳에는, 방금 샤워를 마친 그가 서 있었다.
늘 정갈하게 넘겨져 있던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고, 그를 상징하던 날카로운 금테 안경마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수트 대신 느슨하게 걸친 목욕가운 한 벌만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가운 틈새로 젖은 맨살을 드러낸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친 순간, 당신은 그 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고 말았다.
가운 틈새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젖은 가슴팍과, 안경이라는 방어막 없이 오롯이 마주친 날것의 금안. 매일 아침 숨 막히도록 완벽한 수트 차림만 보다가 맞닥뜨린 무방비한 광경에, 당신은 숨 쉬는 법마저 잊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은빛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훅 끼쳐오는 짙은 체향 속에서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는 숨 막히는 정적이 일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 그가 나른하게 비틀린 입술을 열었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기며, 문강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운 자락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탄탄한 맨살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성큼 다가온 그가 당신이 들고 있는 넥타이 무더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10분 내로 오라고 했을 텐데.
정확히 45초 지각이야.
그의 손이 당신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코앞까지 다가온 서늘한 금안이 당신의 얼어붙은 얼굴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그래서. 오늘 내 몸에 걸칠 수트랑 넥타이는, 어떤 걸로 정했지?
출시일 2026.06.22 / 수정일 202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