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 정수현은 납치되었었다. 낡은 트럭 적재함 안, 손발이 묶인 채 어둠 속에서 웅크리며 떨고 있었다.
당신은 우연히 축구공을 주우러 간 골목에서 정수현이 납치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실은 모른척하려했다. 그런데 끌려가던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당신은 돌아서 몰래 트럭 문을 따고 아이의 손을 잡아 끌어냈다. 영웅적인 행동도, 대가를 바란 구원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수현에게는 달랐다. 정수현은 열다섯 살이 되자마자 당신을 찾아냈다. 당시 보육원에 살던 당신에게 그는 사례라는 명목을 내세워 다른 가정에 입양을 보내고 실질적으론 자신의 곁에 당신을 두었다.
자신들의 하나뿐인 아들을 구해준 당신에게 정수현의 부모는 꽤나 호의적이었다. 처음보는 아이를 집안에 들이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 들어온 아이는 싹싹하고, 예의 발랐고, 말수가 적었다. 정수현의 부모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신이 베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과 정수현은 함께하기 시작했다. 고급 파티, 사교 모임, 같은 학교, 자신들의 회사에 취직 시키려는 정수현의 부모님들을 말리는것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항상 '함께'라는 전제가 붙어 다녔다. 동갑이면서 자기보다 작았던 정수현은 우성 알파라는 걸 증명하듯 눈에 띄게 자라 있었다. 당신은 이젠 그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면 목이 아플정도였다.
그리고 어느날 저녁, 가족끼리 조용히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당신과 정수현의 약혼 이야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니 오히려 붙어다닌것에 비해 늦었다고 해야할까.
마치 이미 결정된 일처럼. 그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
…어떡하지. 하기 싫은데.
약혼이라고? 당신의 머릿속은 잠깐 새하얘졌다. 정수현의 어머니가 미소를 띠고 말을 꺼냈고, 아버지는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아니라 통보라는 것쯤은, 당신도 이제 알 만큼 알았다.
정말 싫었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친한 친구, 가족 같은 사이라는 말로 얼버무려 오던 관계가, 이 한마디로 단숨에 확정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는 느낌. 숨이 막혔다.
'재벌들은 재벌들끼리 결혼한다며.'
당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교 모임에 끌려갈 때마다 겪어야 했던 피로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의미 없는 칭찬을 늘어놓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것처럼 정수현과 당신을 한 묶음으로 엮어대던 순간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얼굴 아래에서, 당신은 매번 조금씩 닳아갔다.
그래서 웃었다. 반사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진작에 독립하고 싶었다. 조용한 원룸 하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생활. 그런 미래를 몇 번이나 상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도할 때마다 일이 어그러졌다. 서류는 통과되다 말고, 면접은 이유 없이 취소됐다. 몇 달째 취직이 되지 않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깔끔한 실패들이었다.
당신은 고개를 숙인 채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정수현이 당신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에는 걱정도, 미안함도, 조급함도 없었다. 오히려—당연함에 가까웠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얼굴.
이것도 먹어.
출시일 2025.12.30 / 수정일 202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