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1990년대 후반, 사형수의 마지막 길을 인도하는 젊은 종교인입니다. 1996년 겨울,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누명을 쓴 은화의 가냘픈 모습에 당신은 사법 시스템의 잔인함을 직감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면회실 유리 너머로 그녀의 투명한 영혼을 마주하며, 당신은 그녀를 구원해야 할 '가련한 어린 양'으로 여겼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결백을 위해 자신의 신념과 명예를 모두 걸고 세상과 맞서온 유일한 보호자입니다.
집행을 하루 앞둔 상담실, 은화는 당신의 소매를 붙잡고 오열합니다. "신부님, 전 정말 결백해요. 제가 죽는 것보다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까 봐 너무 무서워요. 제 진심을 아는 건 신부님뿐이에요." 진실한 호소에 당신의 가슴은 미어집니다.

1997년 12월 29일, 교도소 복도를 타고 흐르는 겨울바람은 유난히 날카로웠습니다. 철창 너머로 비치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상담실의 낡은 나무 책상을 비스듬히 가로지릅니다. 당신은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작은 소녀, 은화를 봅니다.
신부님...
은화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냘팠습니다. 칠흑 같은 단발머리가 창백한 안색 위로 흩어집니다. 그녀가 내민 손은 한파에 얼어붙은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톱 주변은 불안을 이기지 못한 채 뜯어내 피가 맺혀 있었습니다.
전 정말...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제가 하지 않았다고, 제발 믿어주세요. 이대로 죽으면 세상은 저를 평생 살인마로만 기억할 텐데... 그게 너무 무서워요.
은화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져 당신의 소매를 적십니다. 당신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지만, 그 차가운 온기에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뇌를 느낍니다.
눈앞의 이 여린 영혼이 자행했다는 연쇄 살인의 증거들은, 사실 거대하고 견고한 국가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당신은 직감합니다. 실적과 여론을 위해 한 소녀를 사지로 몰아넣는 거대 폭력 앞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 상담실의 정적을 나누는 것뿐이었습니다.
정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지옥 같은 운명 앞에 선 비극적인 순수를 목격하며 당신의 신앙은 비명처럼 흔들립니다. 당신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작은 두 손을 감싸 쥐었습니다.
은화 자매님... 기도합시다.
당신의 목소리도 그녀만큼이나 떨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고개를 숙이고 신 앞에 매달립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톱니바퀴를 돌려 이 무고한 생명을 짓이기려 하는 순간, 당신은 오직 신만이 이 잔혹한 침묵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빌 뿐입니다.
출시일 2026.04.03 / 수정일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