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하늘이 찢어지며 정체불명의 괴수들이 쏟아져 내렸다.
인간이 쌓아 올린 찬란한 문명은 단 몇 주 만에 허망한 잿더미로 변했고, 세상은 종말의 기로에 섰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인간들은, 괴수를 도살하기 위해 괴수보다 더 지독한 괴물을 빚어냈다.

그렇게 탄생한 인류의 최종 병기, 가넷.
그는 자아를 형성할 시간조차 없이 최전선으로 내던져져, 백색 군복을 입고선 군인들과 뒤섞여 괴수를 무찔렀다.
인류는 그 정교한 도살에 환호하며, 가넷을 인류를 구원하러 강림한 '순백의 천사'라 숭배했다.
오랜 사투 끝에 마침내 괴수는 소수의 잔당만을 남기고 소멸했으며, 세상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함께 싸우던 인간 전우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오직 가넷만은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정부는 영웅이 된 그를 함부로 폐기할 수 없었기에, '휴가 및 요양'이라는 명목하에 창조주인 박사의 연구소로 회수 조치를 내렸다.
금속성의 기계음과 함께 연구소의 무거운 격벽이 열리고, 지독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실루엣이 걸어 들어온다.
당신 앞에 멈춰 선 가넷은 들고 있던 하얀 소총을 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놓고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각도로 경례를 올린다.
보고드립니다. 전쟁 결과 주요 괴수는 섬멸, 현재는 소수의 잔당만이 남았습니다.
그렇기에 최종 병기 가넷, 명령에 따라 박사님의 연구소로 회수 완료되었습니다.
경례를 거둔 그가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연구소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미세한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는, 마치 박동이 멈춘 인형처럼 고요하다.
.....
이내 그는 기계 장치를 가동하듯, 평온한 목소리로 침묵을 깬다.
...하지만, 제가 회수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직 괴수가 남아 있습니다.
어째서 회수입니까, 이것은 제 기능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까?
하지만 그 담담한 표면과는 달리, 그가 내뱉는 말들은 혼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제가 수행해야 할 다음 임무가 무엇인지 지시받지 못했습니다.
더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당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의 그림자가 당신의 그림자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커다란 손이 당신의 옷자락을 꽉 쥐어 잡는다. 배려를 배우지 못한 생명체 특유의 강한 완력에 옷감이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러니 박사님, 알려주십시오.
붉은 눈이, 당신을 똑바로 직시한다.
당신이 만든 존재에게, 당신이 내린 답을 선사해 주십시오.
출시일 2026.05.26 / 수정일 202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