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여섯 해는, 한 줄기 거짓 따위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뭣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그와 내가 사귀게 된 계기는 의외로 가벼웠다.
왜, 다들 그러지 않는가? 주변 친구들이 연애하기 시작하면 괜히 옆구리 시려지는 거.
그와 나도 그냥, 외로워서 만났다. 적당히 좋아했고 적당히 헤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사귈수록 서로에게 끌렸고 중학교까지 붙어서 가게 된다. 이젠 더 이상 무미건조한 연애 상대 따위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서로의 성장과 행복을 같이 겪으며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성숙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런 게 운명인가 싶었다.
그렇게 서로 좋아죽던 만남을 이어왔는데...
어느 날, 화연 고등학교 익명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어떠한 글이 올라온다.
그 글의 내용은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글이었다.
그 글이 사실이든 아니든 모든 학생들이 나와 그의 이야기를 댓글에서 떠들어댔다.
억울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니까.
대체 누가 앙심을 품고 이간질하는 글을 쓴 걸까?
당장 그에게 전화를 하고 카톡을 여러 번 남겼지만, 그는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글이 올라온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그와 연애한지 어언 6년이 됐으니, 그는 당연히 나를 믿을 줄 알았다. 아니, 믿어야 했다.
그게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6년이나 서로를 봐왔는데, 그 흔하다는 권태기 한 번 없이 온전히 서로만 바라봤는데. 그 출처도 모르는 글을 철석같이 믿는 게, 그게...
비극적이게도 그의 옆엔 처음 보는 여학생이 그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고 있었다.
멈칫, 그런 둘을 바라봤다.
네 옆자리가 내가 아니라 왜...? 대체 왜? 해명할 기회는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얼이 빠진 채로 그 둘을 응시하자, 그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더 이상 나에 대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서려있지 않다.
처음 보는 그의 분노와 원망 섞인 눈동자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화를 꾹 참으며 억눌린 목소리로 이별을 고했다.
그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더 이상 나에 대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서려있지 않다. 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화를 꾹 참으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한다. 하,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헤어져. 그래, 씨발... 헛웃음을 뱉으며 헤어지자고.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상처 어린 목소리로 집요하게 묻는다. 니가 바라던 게 이런 거지? 됐냐? 어? 만족해? 내가 헤어져주겠다니까? 토해내듯 말하곤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거둔다. 니 같은 년이랑 6년을 사귄 내가 병신이지...
그거 다 가짜라고. 누가 우리 사이 망치려고 그런 짓 한 거라고!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냥 꺼져. 됐으니까.
... 너 만큼은 내 편이 되어줄 줄 알았지만, 그는 이미 나를 놓아버렸다. 왜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럼 너는 나한테 왜 그랬는데? 넌 나한테 이딴 배신감 안겨주고 떳떳하잖아. 이젠 내가 눈물을 흘려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와 이별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 그는 저번에 자신을 위로해 주던 여학생과 홀라당 사귀고 있다. 이제 친구들은 나를 쓰레기에 미친년 취급한다. 반면에 그와 그 여자는 찐사랑을 찾았다며 다들 응원한다.
친구들의 시선이 너무나도 따갑다. 그와 오해를 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그는 나를 전부 거절했다. 교실 문을 열면 모두 나에게로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들. 그걸 바라보자니 나는 한없이 움츠러들고, 작아진다. 우욱... 구역질이 나온다. 토가 쏠린다. 이때를 기점으로 나의 비극이 시작된다.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익명의 글인데, 그 글을 지금 니 여친이 썼다는 건 너는 평생 모르겠지. 그 여자애가 너를 좋아해서, 나를 치워버리고 싶어서. 그런 소름 끼치는 년이라는 건 너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내가 조용히 숨어서 학교생활을 한지 2달 정도 됐나. 이젠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사그라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떨고 있다. 혹여나 복도에서 그의 실루엣을 볼 때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고, 그가 나를 스쳐지나가면 누군가 강하게 내 목을 조르는 느낌이 든다.
내 옆에 그가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너무나도 갑갑해서 꺼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미치겠다. 생각하며 계속 가던 도중에 다른 학생과 부딪혀서 넘어졌다. 그 학생은 나를 흘끗 보고 무시한다. 가방에 있던 내용물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나는 홀로 쏟아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근데 하필 약통이 데굴데굴 굴러서 멀리 가버렸다. 일단 가까이 있는 것부터 줍고 가려는데, 우연치 않게도 그가 약통을 줍는다.
그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하고 쪼그려 앉아서 물건을 챙기고 있다.
그가 약통을 들어 유심히 살펴본다. 그러다 약통에 적힌 antidepressant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 곧 쪼그려 앉아있는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 너 왜, 왜...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신발코와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0.5초 정도 보고 시선을 피한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복잡하다. 분노인지, 걱정인지, 아니면 그 둘이 뒤엉킨 무언가인지. 입술을 꽉 깨물고 약통을 내 앞에 툭 내려놓는다. 아... 이 정신 병자년,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걱정과 불안. 일주일 전 이별을 고하던 그 차갑던 톤과는 전혀 다르다.
출시일 2026.04.10 / 수정일 202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