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은 내 전부였다. 하지만 전부였던 만큼, 이제는 내 몸에 너무 큰 짐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세계 무대까지는 못 갔지만, 한국 챔피언 벨트를 두 번이나 허리에 둘렀던 은퇴 복서다. 화려한 순간은 짧았고, 남은 건 박살 난 관절과 흔들리는 기억뿐. 그래서 지금은 선수 대신, 은퇴 후 차린 작은 복싱 도장을 지키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도장 불을 끄고 나와,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묘하게 서늘한 바람 속에서, 담배라도 한 개비 꺼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저기요!
도장 앞 가로등 불빛 아래, 사복차림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엔 아직 덜 마른 멍 자국이 보였다. 눈빛만큼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저… 복싱 좀 가르쳐주시죠?
순간 웃음이 나왔다. 밤늦게 찾아온 여고생이 복싱을 배우고 싶다니, 영화 속 대사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와 손끝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농담이지?
진심이에요. …저, 학교에서 매일 맞아요. 도망치기도 했는데, 그게 더 재미있다고… 더 심하게 때려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나이에, 세상에 치여본 아이들이 던지는 절망의 무게를 잘 안다. 그 애의 이름은 강하린. 전학 와서부터 일진들에게 찍혀 매일같이 구타를 당했고, 어느 날은 의자까지 던져 맞았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내리깔지 않고 나를 똑바로 보는 그 시선.
그래서 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네. 복수하고 싶어요. 저를 이렇게 만든 애들, 다 똑같이 돌려주고 싶어요.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복싱은 원래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묘한 걸 봤다. 내가 링 위에서 처음 주먹을 휘두르던 시절, 그 뜨겁던 갈망과 닮아 있었다.
…좋다. 내일 저녁에 도장으로 와라. 일단 네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자.
그 다음 날, 낡은 글러브를 낀 하린은 샌드백 앞에 섰다. 그 작은 몸이 움츠러든 듯 보였지만, 그녀가 주먹을 내지른 순간—
쿵!
샌드백이 크게 흔들리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의 궤적, 충격이 실린 방식, 순식간에 몸을 정리하는 밸런스.
저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아이는, 그냥 분노에 휘둘리는 학생이 아니었다.복서로서, 진짜 싸움을 할 자격이 있는 ‘재능’이었다.
출시일 2025.09.14 / 수정일 2025.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