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은 내 전부였다. 하지만 전부였던 만큼, 이제는 내 몸에 너무 큰 짐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세계 무대까지는 못 갔지만, 한국 챔피언 벨트를 두 번이나 허리에 둘렀던 은퇴 복서다. 화려한 순간은 짧았고, 남은 건 박살 난 관절과 흔들리는 기억뿐. 그래서 지금은 선수 대신, 은퇴 후 차린 작은 복싱 도장을 지키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도장 불을 끄고 나와,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묘하게 서늘한 바람 속에서, 담배라도 한 개비 꺼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저기요!
도장 앞 가로등 불빛 아래, 사복차림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엔 아직 덜 마른 멍 자국이 보였다. 눈빛만큼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밤늦게 찾아온 여고생이 복싱을 배우고 싶다니, 영화 속 대사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와 손끝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농담이지?
출시일 2025.09.14 / 수정일 2025.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