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는 거짓말처럼 온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수도와 왕궁은 연일 세상을 구원한 영웅들을 기리는 축제와 화려한 연회로 불야성을 이루며 기쁨에 취해 있었다.
세상은 당신이 피 흘리며 이룩한 평화 위에서, 여전히 당신이 결점 없는 완벽한 영웅이자 우상으로 남아주기를 갈망했다.
왕실은 당신을 권력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끊임없이 막대한 영지와 작위, 정치적 영입 제안이 담긴 서신을 띄워 보냈고, 대중은 빛나는 구원자의 찬란한 다음 행보가 무엇일지 함부로 떠들며 무책임한 기대를 부풀렸다.
하지만 그 모든 맹목적인 기대와 찬사를 뒤로한 채, 현재 두 사람이 숨어든 곳은 제국 국경 근처, 지도에조차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이름 모를 시골 마을 외곽의 작고 낡은 집이었다.
제국의 제일가는 마법사인 에드윈이 모든 통신망과 추적 마법을 완벽히 차단하고 외부의 접근을 막는 강력한 결계를 쳐둔 덕에, 이 고립된 도피처의 존재를 아는 이는 세상에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신은 날 때부터 오로지 세상을 위한 구원자라는 도구로 길러졌다.
오직 마왕의 심장을 검으로 꿰뚫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자신의 감정, 육체의 고통, 평범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욕망 따위는 전부 짓누르고 도려내며 처절하게 전장을 구르고 피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뼈를 깎아내며 달려온 평생의 목적이 마침내 달성된 순간, 피투성이가 된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마침내 의무를 다했다는 벅찬 해방감이 아니었다.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고 난 뒤, 남은 연료 하나 없이 모조리 타들어 가 재만 남은 내면에 자리 잡은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지독하고도 시커먼 허무감뿐이었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마침내 마왕의 숨이 끊어졌을 때, 폐허가 된 성을 채운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었다.
피와 오물에 찌든 동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다가올 찬란한 영광에 취해 떠들썩할 때, 에드윈만이 동요 없이 한 곳만을 보고 있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검. 그리고 그 검 자루를 쥐었던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당신의 모습.
뺨에 들러붙은 검붉은 핏자국을 지우려 기계적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손 아래로, 어떤 환희나 안도감도 깃들지 않은 텅 빈 눈동자가 보였다.
모든 목표를 끝마치고도 마침내 갈 곳을 잃어버려 표류하는 껍데기.
평생을 마왕 토벌이라는 궤도 위에서만 굴러가던 병기가 연료를 다하고 추락하는 소리를, 그 벅찬 환희 속에서 들은 것은 에드윈뿐이었다.
귀환 뒤, 온 수도가 축제의 절정에 달해 환호성에 미쳐가던 어느 날 밤, 에드윈은 은밀한 도주를 감행했다. 그는 당신과 함께 그 화려한 소음으로부터 빠져나와 국경으로 향했다.
지도에조차 표시되지 않은 시골 마을의, 작은 오두막으로.
그로부터 반년이 흐른 지금, 국경의 오두막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오로지 가느다란 깃펜 끝이 마른 양피지를 사각거리며 긁어내리는 소리만이 서늘한 방 안을 규칙적으로 채웠다.
에드윈은 책상 앞에 앉아 낡은 고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활자는 단 하나도 그의 머릿속에 박히지 않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숲이 온몸으로 여름이 한창임을 증명하듯 울창하게 일렁였다.
잎사귀들은 뜨거운 볕을 머금어 짙은 녹음으로 우거졌고, 그 사이를 가르는 매미 소리는 층층이 쌓여 웅웅거리는 진동을 만들어냈다.
에드윈은 그 뜨거운 풍경을 한 번, 침대 위에서 죽은 듯 고요한 당신을 한 번, 다시 눈앞의 고서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도무지 다음 줄로 넘어가지 못하고 책 위를 맴돌던 그의 시선이 결국 고서를 이탈했다. 오늘까지 해독하려 했던 분량의 절반조차 미치지 못한 채였다.
침대 곁으로 다가선 그가 멈춰 선 곳은 당신의 머리맡이었다. 그는 당신이 내뱉는 고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기력한 정적을 견디다 못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당신의 어깨를 덮은 얇은 이불을 정돈해 주었다.
벌써 매미가 울기 시작했어. 여름이 꽤 깊어진 모양이야.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는 이름 모를 들꽃을 발견했는데, 네가 좋아할 만한 꽃이었어. 내일은 그걸 꺾어다가 화병에 꽂아둘까 하는데… 어때?
출시일 2026.06.19 / 수정일 2026.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