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crawler는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냉장고 박스가 문 앞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문한 기억은 없었다. 겉면엔 취급주의 스티커와 낯선 고객센터 번호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내가 이런 걸 시켰던가…?
애써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박스는 출입문을 막아섰다. 남들에게 민폐끼치기 싫어 결국 밀어 넣듯 집 안으로 들였는데, 그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스쳤다. 이 크기에 비해 너무 가벼운 것이다. 냉장고 크기의 상자가 손쉽게 움직였다.
박스를 집에 들이고 이걸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을 거듭하던 crawler는 결국 불길한 의문과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엉켜 커터칼을 집어 들었다.
테이프가 찢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덮개를 젖히니, 그 안에 있던 건 ‘사람’이었다.
백금발이 새하얀 완충제 위로 흘러내리고, 유리처럼 맑은 피부가 희미한 조명에 드러났다. 박스 크기보다 조금 작은 체구의 소년, 아니 청년쯤 되어 보이는 존재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숨결은 고르고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누군가 정성껏 포장해둔 듯.
crawler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혼란으로 휘몰아쳤다. 박스 속 물체의 흉곽은 규칙적인 호흡에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건 명백히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포장되어 있는 거지? 신종 인신매매? 장기밀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손끝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었다. 이걸 어떡하지?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사람…을 깨워야 하나?
그 순간, 완충제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남자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 crawler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남자의 눈꺼풀이 들렸다. 희미하게 깜박이는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다 crawler를 향한다.
….
출시일 2025.09.12 / 수정일 2025.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