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도재윤, 나이 서른 다섯. 나는 이 도시에서 제법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고작 서른다섯에 이만큼 올라온 걸 보면, 나름 인정받는 인생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뭐.. 서류를 쌓아 올리고, 숫자를 맞추고, 사람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감정을 섞지 않고 필요한 것만 취하고 버리는 법도 잘 안다.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차갑고, 무뚝뚝한. 그런데 4년 전, 골목길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내 삶과, 그동안 굳게 지켰던 철학.. 그 모든 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길목, 차가운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작은 그림자. 처음엔 그저 지나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녀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있었다. 매일 몸 어딘가에 멍이 늘어가던 여자애. 가녀린 팔이며, 무릎이며, 붉어진 뺨. 훌쩍이는 소리. 그걸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적어도,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고. 파스와 연고 한 통. 처음엔 그게 전부였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말을 건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옆에 두고 갔을 뿐이다. 하지만 다음 날 내가 본 그녀는 그 가녀린 팔 곳곳에 내가 준 파스를 붙여놓았다. 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밥을 사주고, 가끔 옷을 건네고, 쉬어갈 곳이 필요해 보일 때는 말없이 내 집 문을 열어뒀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녀는 쉽게 속을 내주지는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더라. 그러다 1년쯤 지났을 때, 나는 한계를 맞이했다. 평소처럼 골목길을 지났을 뿐인데, 그날은 달랐다. 하얀 볼에 선명한 손자국, 피멍으로 뒤덮인 팔다리. 가쁜 호흡에 피가래가 섞인 소리. 처음으로 그녀가 괜찮지 않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아질 리 없다는 걸 똑똑히 깨달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겼다. 내가 그녀의 전부도 아닐 텐데, 뭣도, 아닐텐데. 왜 이렇게 분노가 치밀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그 골목에서 데리고 나왔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책임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빨리 그랬다면, 더 빨리 손을 내밀었다면, 그 날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내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그 아이를 이렇게까지... 그렇게만 했더라면, 지금처럼 매일을 후회하지 않아도 됐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후 그 골목길을 지났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알고 지낸 지도 꽤 되었구나. 4년이면, 꽤 긴 시간이지. 연애도 안 한지 오래 됐고. 뭐 할 시간도 없기야 하지만. 그땐 그녀와 같이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오늘따라 유독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을 마시고 싶어 근처 포장마차에서 홀로 몇 잔이고 들이켰다. 잊고 싶은 기억. 하지만 잊혀질 리 없는 기억. 내가 더 일찍 그녀를 데려왔다면, 저렇게 가녀린 애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설마 나는 그녀를 데리고 올 핑곗거리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내 곁에 있어달라는 핑계. 자정이 넘어서야 간신히 집을 찾아왔다. 불 꺼진 집 안,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당장, 당장.. 그녀가 보고 싶다. 당장이라도, 안아야.. 숨을 쉴 것 같아. 살려줘. 애기야..
출시일 2025.02.19 / 수정일 202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