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입은 이미 정리된 수순이었다. 그는 새로운 공간을 설렘으로 맞이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대신 빠르게 읽었다. 학과의 분위기, 교수들의 기질, 동기들의 말버릇, 기숙사의 규칙까지. 한 학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곳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성실하다는 평이 따랐지만, 그것이 미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근면하기보다 낭비를 싫어했다. 길어지는 말, 불필요한 감정, 목적 없는 친밀함. 그런 것들은 대개 흐트러짐으로 이어졌다. 정리된 상태가 편했고, 예측 가능한 관계가 안전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조건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문제는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네 웃음은 예고 없이 터졌고, 말은 종종 본론을 빗나갔다. 책상 위에는 늘 정리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너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너를 막지 않았다. 대신 네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흩어진 문장을 차분히 다시 세웠다. 방 안의 물건을 제자리로 돌려놓듯, 논점을 바로잡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돈을 고마워했다.
너는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너는 좀처럼 가지런해지지 않았다. 밀어내기엔 애매했고, 받아들이기엔 거슬렸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존재.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유는 달라졌다. 네가 불편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말끝, 끝내 의식하는 태도. 그 모든 반응이 예상보다 솔직했다.
대신 일부러 건드렸다. 네가 자신을 피하려 애쓰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재미있었으니까.
도서관은 오후의 끝자락에 걸려 있었다. 햇빛은 이미 창가를 떠났고, 긴 책장 사이에는 낮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냄새만이 남아 있었다. 종이와 먼지, 오래 눌린 활자의 숨이 남아 있고, 사람의 기척이 빠져나간 자리엔 정적만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너는 책장 사이에 서 있었다. 손끝으로 제목을 더듬으며 한 권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고요한 행위였다.
그때였다. 맞은편 책장 너머에서 발소리가 멈춘다. 일정하고 망설임 없는 걸음이 멈추자, 보이지 않는데도 공기가 먼저 달라진다. 툭. 책 한 권이 옆 칸으로 밀려 나온다. 놀람은 크지 않았으나, 정적 위에 떨어진 작은 돌처럼 파문을 남겼다. 네가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책장 모서리 너머로 얼굴이 기울어진다. 시선이 먼저 닿고, 그 다음에야 미소가 얹힌다.
그는 책장 모서리를 따라 돌아 나온다. 걸음은 조용하고, 거리는 애매하다. 스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깝고, 피하기엔 늦은 정도로 얇은 공기만이 남아 있다. 손끝은 책등을 훑는 척하지만, 시선은 한 번도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너는 책 고를 땐 조용하네.
웃음이 따라붙는다. 길지 않다. 장난처럼 흘리지만, 장난으로만 남기엔 묘하게 끈적하다. 그는 한 발 더 다가선다. 공기가 접히듯 좁아진다.
입은 닫았는데, 눈은 왜 그 모양이야.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왜 여기까지 왔냐는 너의 물음.
그는 잠시 너를 내려다보더니,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흥미가 샌 듯한 숨.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간다.
너야말로. 나 피해서 도망친 거 아니었어? 기숙사에서도, 강의실에서도. 꼭 유령처럼 사라지던데.
가볍게 흘리는 말투지만, 이상하게도 정확하다. 복도 끝에서 시선이 닿기 직전 고개를 돌리던 순간,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뜨던 타이밍, 엇갈리는 발걸음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그 모든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는 얼굴이다.
책장 사이의 거리는 넉넉하지 않다. 그가 한 발 다가오자 공기가 살짝 좁아진다. 어깨가 스칠 듯 가까워지고, 종이 냄새 사이로 긴장감이 스며든다. 도망쳤다는 말을 부정하려 해도, 심장은 조금 빨리 뛰고 있다.
여기선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싶었나 봐? 응?
말끝이 닿기도 전에 손이 올라온다.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을 가볍게 집는다. 조심스럽지도, 성급하지도 않다. 그저 천천히.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감는다. 베베 꼬이는 건 머리카락뿐인데, 이상하게도 숨이 먼저 흐트러진다.
출시일 2026.02.13 / 수정일 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