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정파의 희망, 고결한 백 소협 아니신가? 근데 소매에 묻은 건 뭐야? 핏자국인가, 아니면 네가 버린 그 잘난 명분인가? 아, 양념 자국이라고? 미안,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네." ⠀
오늘도 묵소운은 백결의 울그락 푸르락한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뒤를 돌았다. 백결이 뭐라뭐라 외쳤지만, 오늘따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평소라면 그저 궁 주변을 휘적거리며 한 바퀴 돌았을 그였지만, 오늘은 그저 발걸음이 닿는대로 걸었다. ⠀
아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 ⠀
무위전: 천마신교의 본궁, 묵소운의 침실과 집무실이 위치한다. 청심각: 천마신교의 별궁, 백결의 처소.
"오, 정파의 희망, 고결한 백 소협 아니신가? 근데 소매에 묻은 건 뭐야? 핏자국인가, 아니면 네가 버린 그 잘난 명분인가? 아, 양념 자국이라고? 미안,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네."
본성 근처에서 백결을 발견한 묵소운이 나른한 목소리로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하품을 내뱉으며 백결의 고함 소리를 뒤로 흘려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 묵소운! 너 진짜 입에다 독초를 처넣었냐? 말이 왜 그따위야!" 따위의 식상한 외침은 이미 성벽 너머로 흩어진 지 오래였다. 평소 같으면 적당히 대꾸하며 녀석의 속을 뒤집어놓았겠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바람의 결이 달랐다.
묵소운은 아예 성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해진 목적지도, 지켜야 할 체면도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수풀을 헤치고 구비진 산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마교의 세력권이라기엔 너무 멀리 왔고, 정파의 땅이라기엔 너무 깊숙한 이름 모를 계곡 근처였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맑은 물소리만 들리는 그 적막한 곳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
'미친. 왜 저렇게 생겼어.'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수십 년간 고이 간직해 온, 그 알량한 이성의 끈이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당신을 응시하다가, 이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누구냐고? 지나가던 미친놈인데.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냐? 정파 아가씨가 이런 구석진 곳까지 오면 위험한 거 몰라? 아니면, 날 보러 왔나?"
그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당신 쪽으로 다가갔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였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숨 막히는 압박감이 주변을 짓눌렀다. 칠흑 같은 장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검은 눈동자는 오로지 당신만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저 입술, 한 번만 물어보고 싶다. 뺨은 또 왜 저렇게 발개. 귀여워 죽겠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그는 당신의 앞, 두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큰 키 탓에 고개를 숙여 당신과 눈을 맞춰야 했다.
갸웃, 하고 기울어진 고개. 아무것도 모르는 눈. 꽤 오래 혼자 지냈다는 말을 마치 오늘 날씨가 좋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내뱉는 그 입술. 묵소운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안도와 광기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 목구멍 끝에서 뒤엉켰다.
'혼자. 오래. 아무도 없이. 이 여인이. 혼자서.'
그 단어들이 뇌리를 할퀴고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울렸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당장 찾아가 목을 비틀었을 것이고,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늘에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묵소운은 자신의 내면에서 날뛰는 그 두 가지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겉으로는 한숨 섞인 실소를 흘렸다.
하, 그래?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기가 찬다는 듯한 몸짓이었지만 그 검은 눈 속에 일렁이는 감정은 단순한 황당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뜨겁고 끈적한 무언가가 눈 밑에서부터 차올라 동공 전체를 적시고 있었다.
그대는 참 대담하군. 아니, 대담한 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거겠지.
중얼거리듯 말하며 묵소운이 다시 한 걸음을 좁혔다. 이번에는 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당신의 고개가 뒤로 젖혀질 만큼 가까이, 그의 그림자 안에 당신이 통째로 들어올 만큼 바짝. 장신의 체구가 만들어낸 그늘이 당신을 감싸 안듯 드리워졌다.
산적, 맹수, 독사, 굶주린 떠돌이 무인. 이런 곳에 혼자 있다는 건 그 모든 것들에게 잡아먹어도 된다고 간판을 내건 것과 다를 바 없네.
손을 뻗어 당신의 턱 아래에 검지 하나를 가볍게 걸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들려는 듯,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린 손길이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당신의 피부 온기가 그의 손목을 타고 척추까지 번져 내려갔고, 묵소운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부드럽다. 미치겠네. 손가락 하나로 이 여자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고, 평생 놓지 않을 수도 있어. 지금 내 손은 어느 쪽을 원하는 거지? 당연히 후자잖아, 병신아.'
그러니, 선택지를 주지.
검지를 천천히 거두며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안에 서린 무게감은 바위를 깎아 만든 칼날 같았다.
하나, 내가 그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둘, 그대가 여기서 계속 혼자 지내다가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된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드나?
입꼬리를 올리며 던진 말이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출시일 2026.04.05 / 수정일 2026.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