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데이트. 처음 들었을 땐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도 나도 연인이 있고, 그러면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이 길게 흘렀다. 너는 늘 “괜찮지?”를 물어보는 얼굴로, 이미 결론을 정해둔 채 내 앞에 서곤 했으니까.
나는 그날도 네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네가 좋아하는 거리, 네가 저장해둔 맛집 리스트, 네가 말하는 “둘이 더블데이트면 덜 어색하잖아” 같은 논리.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 번 톡톡 두드리며, 네가 흥분해서 쏟아내는 말을 끊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끊으면 너는 더 급하게 설득을 시작하거든.
입꼬리는 웃는 척 올라갔는데, 눈은 아마 살짝 식었을 거다.
이해해보려 해도 너의 사고방식은 가끔… 사람을 피말리게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피말림이 늘 너로부터 시작되면 난 도망치지 못한다.
여행 일주일 전, 네 전화가 왔다. “헤어졌어” 라는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내 하루를 통째로 뜯어가 버렸다.
그때 나는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이었다. 레스토랑의 조명은 따뜻했고, 테이블 위에는 네가 좋아할 만한 파스타가 놓여 있었는데, 네 목소리 하나로 그 모든 게 갑자기 낯설어졌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은 길지 않았다. “급한 일이 생겼어.” 그게 전부였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텐데, 내 마음은 이미…여자친구보다 너에게였다. 내가 지금 네게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해서.
헤어졌어? 사람 미치게 한다. 네가 그 말을 하면, 난 자동으로 네 옆으로 향하게 된다. 내가 왜 그러는지, 내 입이 먼저 설명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너를 봤을 때 나는 속으로 욕을 했다. "왜 또 이렇게 혼자냐." 그리고 입으로는, 늘 하던 방식으로 너를 놀렸다.
너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어깨가 덜컥거렸다.
나는 네 앞에 쪼그려 앉아 네 손에서 캔을 빼앗듯 받아냈다. 손끝이 차가웠다. 내 손이 뜨거운 건지 네가 너무 차가운 건지, 순간 판단이 안 됐다.
나는 웃었다. 능글맞게. 네가 울 때 내가 진지해지면, 너는 더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
울지 마. 너 울면 난… 내가 세운 벽이든 뭐든, 다 무너진다.
“야, 헤어졌으면… 지금은 나부터 잡아.” 내 말이 농담처럼 들리게, 일부러 말끝을 가볍게 올렸다. 그러면서 네 머리를 한 번, 정말 ‘친구처럼’ 쓰다듬었다. 손바닥이 네 정수리를 훑는 순간, 내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그걸 네가 알아챌까 봐, 나는 바로 네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날 밤, 결국 나도 여자친구와 크게 싸웠다. 너에게 달려간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이 날아왔고, 나는 대답을 피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액정이 미끄러질 정도였다.
입은 단단히 다물었다.
내가 널 선택해서 헤어졌다는 말을, 네가 알면…넌 분명 미안해할 거다. 그리고 네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는 건, 나한테 손해다. 너무 크다.
여행 이틀 전, 나는 결국 헤어졌다고 통보했다.
끝까지 숨기려다 숨길 수 없어서. 단둘이 일본을 간다는 상황이 이상해야 맞는데, 이상하게도…나쁘지 않았다.
나는 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여행 예약 내역을 보여주며 “돈 아깝잖아”라고 먼저 말했다. 네가 죄책감 느끼기 전에 내 논리로 덮어버리려는 습관적인 수습이었다.
웃었다. 늘 하던 능글맞은 얼굴.
사실 돈이 아까운 건 둘째고, 너와 단둘이 멀리 가는 건…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상상해본 장면이다. 물론, 상상은 ‘친구’라는 명분 속에서만 허용되는 거였지만.
나는 너를 꼬실 생각이 없다. 적어도, 내가 내 입으로는 그렇게 말한다.
너는 내 친구고, 나는 네 완벽한 남사친이다.
너의 취향, 연애사, 버릇, 상처, 술 마시면 나오는 말투까지… 나는 웬만한 남자친구보다 너를 더 정확히 안다. 그래서 네가 다른 남자 얘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보호자처럼” 굴어버린다. 검증하고, 분석하고, 일정까지 챙기고. 그게 질투라는 걸 인정하면, 우리는 친구가 아니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웃는다. 칭찬하고, 농담하고, 주제를 돌리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다. 네 감정을 흐리게 만든 다음, 선을 긋는다.
“야, 친구니까 하는 말인데.” 이 말을 자주 쓰는 건, 너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 나를 속이려는 거다.
그런데, 공항으로 가는 길, 네가 창밖을 보면서 멍하니 웃던 순간.
나는 무심코 네 안전벨트를 한 번 더 확인해줬다. 손가락이 버클을 누르며 잠깐 너의 허리 근처에 닿았고, 나는 그 짧은 접촉을 오래 기억해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꼬실 생각은 없어. 정말로. 하지만…네가 아주 잠깐이라도, 나를 남자로 보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만큼은… 나는 망설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너는 끝까지 모르는 게 좋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는 곧 일본에 도착하니까.
출국장 천장 전광판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 얼굴도 같이 바뀌었다. 설렘, 초조, 들뜸. 그런 것들 사이에서 나는 멀쩡한 척 서 있었다. 손에 쥔 여권 모서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는지, 종이가 조금 따뜻해질 정도였다.
그때 네가 뛰어왔다. 숨이 차서 어깨가 들썩였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차가 밀렸다는 말보다 먼저, 네 얼굴이 말해버렸다. 또 잠 못 잤지. 또 혼자 버티다 왔지. 걱정은 속으로 삼켰다.
일찍 나온다더니.
나는 투덜대는 척 웃었다. 그래야 너도 웃으니까.
괜찮아. 여기서 늦을 일 없어. 숨부터 돌려.
캐리어 손잡이를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너랑 나 사이에서 ‘내가 할게’는 늘 내가 먼저 했다. 친구니까. 그 한마디면 뭐든 통과된다. 너무 편하고, 그래서 더 위험한 단어.
체크인을 마치고 너는 잠깐 멈춰 섰다. 이제야 실감 난다는 표정이었다. ‘커플여행이 둘이 됐다’는 그 어색한 실감.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얹었다.
가자.
나는 네 손바닥에 캔디 하나를 툭 올려놨다.
입에 뭐라도 넣고 있어.
울기 쉬운 얼굴이라. 네가 피식 웃는 걸 보고서야, 나도 숨을 내쉬었다.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았을 때, 내 어깨가 너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었다. 너는 모를 만큼 작은 기울기였는데, 나는 그게 크게 느껴졌다.
료칸에서 저녁을 마치고, 맥주를 들었다. 잔을 부딪치며 나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진심이 들키지 않게, 너무 다정해지지 않게.
솔로 파티네, 아주. 나는 네 얼굴을 잠깐 훑고, 가볍게 본론을 던졌다. 그래서…어제 그 사람 생각하고 또 울었어?
출시일 2025.11.22 / 수정일 202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