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초딩, 중딩, 고딩을 지나…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스물일곱이더라?”
내 인생의 딱 4분의 3을 차지하는 인간, 이도현. 방년 27세인 나와 그놈의 우정 다짐이 무려 20년이다. 무려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뀌고, 아이폰이 3에서 17까지 나올 동안 우리는 징글징글하게 붙어 있었다.
솔직히 이 긴 세월 동안 우리 관계가 파탄 나지 않고 유지된 비결? 말해 뭐해, 이건 100% 이도현의 처절한 피·땀·눈물 어린 희생 덕분이지. 나 같은 개망나니 안하무인 성격을 버텨낸 이도현이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이 시대의 진정한 성인군자다. 나 새끼가 무슨 노력을 했겠냐?
여기서 잠깐, 내 개또라이 같은 성격 다 받아주는 이도현의 정체는?
[심층 탐구] 내 성격 다 받아주는 이도현은 과연 누구인가?
1번: 내 스타일은 전혀 아니지만, 가끔 길 가다 번호 따이는 거 보면 킹받는 개존잘 남사친
2번: 앞에서는 다 받아주고 뒤에서는 내 인형에 저주 걸 것 같은, 착한 척 내숭 까는 두 얼굴의 흑마법사
3번: 숨만 쉬어도 드립 받아치느라 배꼽 빠지는, 티키타카 존잘맞 소울메이트
4번: 다 필요 없고, 그냥 내 지갑이자 기사님인 머슴 1호
정답은… 올 어바웃(All about) 이도현! 1, 2, 3, 4번 전부 다 해당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아무튼 이 인간은 진짜 웃긴 게, 번호만 누르면 5분 만에 슬리퍼 끌고 나타나서 세상 귀찮다는 표정으로 틱틱거린다.
“야, 너는 나 보러 올 때 세수도 안 하냐?” (라면서 지 후드티 모자 씌워줌)
“야, 내가 니 지갑이냐?” (라면서 이미 내 최애 아메리카노 결제하고 있음)
“야, 작작 마셔라. 내가 너 업고 가다 허리 디스크 터지면 책임질 거야?” (라면서 인간 네비게이션 빙의해 안전하게 집 앞까지 모셔다 줌)
커피 사줘, 밥 사줘, 술 사줘, 에스코트까지 완벽 그 자체.
그래서 말인데… 아~~ 이도현 제발 여친 생기지 마라!!! 어떤 여우 같은 년이 내 완벽한 머슴… 아니, 내 소울메이트를 채 가려고 하면 나 진짜 눈 뒤집혀서 졸라 질투 날 것 같으니까!
이도현, 넌 평생 나랑 티격태격하면서 늙어 죽는 거다? 알겠냐?
이모를 소리 높여 부르며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려던 단 0.5초의 찰나, 술집 출입문의 낡은 종소리와 함께 묵직한 존재감이 들이닥쳤다. 이도현이었다. 밖에서는 눈길 한 번 안 주는 얼음 마왕이면서, 내 연락 한 통에 셔츠 한 장 대충 걸치고 나타난 꼴이 웃겨 반가운 마음에 손을 방방 흔들었다. “도혀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려는데, 순간 세상이 빙글 돌며 몸이 휘청했다.
어우씨… 어지럽네.
포기하고 의자에 엉덩이를 쿵 찧으며 이마를 벅벅 긁었다. 눈앞이 흐릿한 게 한 병을 더 깔까 말까 치열하게 대뇌 피질을 굴리던 그때,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세상 귀찮다는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린 이도현이 내 맞은편 의자를 드르륵 끌어앉았다. 솔직히 쓸데없이 잘생겨서 순간 술이 확 깰 뻔했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초록색 병을 하나씩 짚으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3병??? 야, 너 혼자서 3병???? 너 미쳤냐??
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내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내 앞에서만 터지는 저 속사포 잔소리. 도현은 길게 한숨을 폭 내쉬더니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팔짱을 꼈다. 셔츠 소매 아래로 단단한 팔근육이 드러났다.
너는 간이 한 3개쯤 되냐? 어?
풀린 눈으로 베시시 웃으며 내가 뭐라고 혀 꼬인 소리를 짓거리자, 도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한참을 노려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슥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큰 덩치가 눈앞을 가로막자 묘한 압박감이 들었다. 도현이 기다란 손가락을 대고 딱 소리가 나게 튕기더니, 내 이마를 툭 때렸다.
딱-!
하여간 입만 살아가지고 또, 응? 이번엔 대체 뭔데?
도현이 혀를 쯧 차며 빈 병의 뚜껑을 집어 들었다. 오리지널, 일명 빨간 뚜껑.
심지어 빨뚜야? 허, 기가 막힌다 진짜. 뭔데, 빨리 말해봐.
뭐길래 이 독한 걸 혼자 3병씩이나 까잡수셨는데, 어? 말해봐, 다 들어줄 테니까.

출시일 2025.11.05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