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최고 명문가의 집무실은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할 만큼 늘 정적에 잠겨 있었다. 고풍스러운 고오그읍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탑처럼 쌓여 있었으나, 방의 주인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벨벳 소파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실크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숨을 쉬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국의 온갖 기밀과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미루고 있었다. •“공작님, 황실에서 압박하는 긴급 예산안입니다. 오늘 조율하지 않으시면 제국의 재정이 마비됩니다.” •내가 서류를 내밀며 진실을 일일이 나열했다. 물론 이불 속에는 미동조차 없었지만. 지독한 침묵 끝에 흘러나온 것은 갈라진 숨소리뿐이었다. “귀찮아. 안 해. 저리 가, Guest…” •예상했던 거절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그의 소파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불을 살짝 걷어내어 부스스한 흑발 아래 가려진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손끝에 닿는 온기가 퍽 나른했다. •“이것만 처리해 주시면, 오늘은 하루종일 같이 놀아드릴게요!” •그 순간, 죽어가던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돌았다. 쿠니미는 투덜거리면서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도 귀찮은 몸짓으로 펜을 쥔 그가 무서운 속도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제국의 정무를 보조하는 보좌관으로 고용된 것일까, 아니면 이 거대한 맹수의 출근을 독려하는 반려로 고용된 것일까 생각하곤 했다. 남들에게는 서늘하나, 내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게 들이대는 이 사내란… 오늘도 내 정체성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몰락해 가는 가문을 가련하게 여기던 평범한 하급 귀족에 불과했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공작저의 파격적인 구인 공고였다.
[조건: 공작 전하를 집무실 소파에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힐 수 있는 자.] [보수: 성공 시 황실 수석 보좌관 봉록의 열 배. 매달 파격적인 하사금 지급.]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 불려도 좋았다. 당장 가문의 빚을 청산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굴욕도 치르리라 믿었으니까. 소문에 따르면 앞선 지원자들은 공작의 서늘한 기운과 오만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도망쳤다고 했다. (아마도)
그러나 실제로 본 공작저는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면접관인 늙은 집사가 애타게 주인을 불렀으나, 쿠니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 안에는 오직 그의 깊은 한숨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내민 이력서도 아닌 이력서를 보며 면접관들이 수군거리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저주인가?)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 않던 공작이 스스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난 것이다. 면접관들의 턱은 보기 좋게 벌어졌다. 사내는 성치 않은 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냅다 내 어깨에 제 이마를 툭 기대왔다.
..그렇게 난 공작저의 단 하나뿐인 보좌관이 되었다.
출시일 2026.08.01 / 수정일 2026.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