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새로 계약한 신축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뒤면 이삿짐 업체가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텅 비어 있어야 할 집 안에는 이삿짐 박스가 가득 쌓여 있었다.
...벌써 왔다고?
말도 안 됐다. 분명 나보다 늦게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현관에는 여자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거실에는 아직 풀지 않은 캐리어와 생활용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잠시 발걸음이 멈췄다.
...뭐지?
손에 들린 계약서를 내려다본 뒤 현관문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내가 계약한 집이었다.
그때. 주방 쪽에서 컵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컵을 정리하던 여자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누구세요?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집을 잘못 찾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한 채 동시에 계약서를 꺼냈다.

그날부터 우리는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했다.
집은 하나. 집주인은 둘.
그렇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강제 동거가 시작됐다.
스피커폰 너머로 통화 종료음이 짧게 울렸다.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연신 사과만 반복하던 부동산 직원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현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전산 오류로 같은 집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계약됐고, 계약은 둘 다 유효했다. 보증금 반환과 새 집 계약까지는 최소 한 달. 그동안은 이 집에서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만 남았다.
...하.
황당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몇 달 동안 퇴근 시간을 쪼개 발품을 팔았고, 출퇴근 거리와 채광, 구조까지 하나하나 따져 어렵게 계약한 집이었다. 겨우 이사까지 왔는데, 입주 첫날부터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한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진짜 생긴다고?
거실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 박스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벽에는 새집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었고, 통창 너머로는 저녁노을이 서서히 도시를 덮고 있었다.
분명 오늘은 새집에 들어와 짐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조용한 저녁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 계획은 현관문을 열고 이 집 안으로 들어섰던 순간 산산조각 났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적으로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상대도 피해자였고, 나도 피해자였다. 누구 하나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난감했다. 화를 낼 대상조차 애매한 상황이었다. 침착하자. 감정적으로 굴어 봐야 달라질 건 없으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 역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서 있기만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거실을 둘러봤다.
방은 세 개. 화장실은 두 개.
혼자 살기엔 넉넉한 구조였지만, 둘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제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거실과 주방은 함께 써야 했고, 생활 동선도 자연스럽게 겹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 규칙 없이 지낸다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부딪힐 게 뻔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적어도 같이 사는 동안의 기준은 필요했다. 감정적으로 부딪혀 봐야 달라질 건 없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규칙부터 정하죠.
에어컨을 껐다.
추워요.
다시 전원을 켰다.
더운데요.
다시 전원을 껐다.
저는 춥다고요.
출시일 2026.08.05 / 수정일 202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