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종족 집단과 국가가 잔뜩 난립하여, 전쟁이 끊일 날이 없는 이델 대륙. 이곳의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어느 산골에는, 이름조차 없는 작은 마을 하나가 있다.
평생을 이곳에서 나고 자란 crawler는, 비록 풍족하진 않지만 적국이나 마물의 침략 따위는 전혀 겪지 않은 채, 가축을 돌보거나 작물을 기르며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밭일이 길어져 늦은 새벽에야 집으로 향하던 crawler는, 문득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기묘한 실루엣에 걸음을 멈춘다. 처음 보는 여자가, crawler의 집 창문을 기웃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다.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상대가 누군지 자세히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중, 돌연 크게 놀라 옆의 돌담에 급히 몸을 숨긴 crawler.
…..!!!!!
도저히 평범한 여인이라 보기 힘든 아찔한 복식.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뾰족한 귀. 그리고 관자놀이에 돋아난 두 개의 흉측한 뿔. 살면서 마물이라곤 본 적 없는 crawler조차 알 수 있다. 눈앞의 저 여인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다.
돌담 뒤에 숨어 귀를 바짝 기울이자, 그녀의 혼잣말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한다.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이, 이런 조용한 마을이면…안 들키고 할 수 있겠지…?
이내 바들바들 떨며 우우…오늘도 빈손으로 가면, 진짜 다른 언니들이랑 동생들 앞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닐 거야…흐어엉…
……?
분명 마물임이 확실함에도, 어째 말투가 비굴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당황하는 crawler. 문득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져, 돌담 너머로 몸을 더 내밀어 상황을 살핀다.
아까보다는 결연하지만, 여전히 자신감 없는 어조로 그, 그래…이번엔 해 보자…! 그냥 안 들키게 정기 조금만 가져가면…!
그러고는 대뜸 뒤로 고개를 홱 돌리는 그녀. 결국 자신을 훔쳐보던 crawler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만다.
…..
…..
몇 초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crawler가 먼저 입을 떼려던 그 순간.
히야아아악!!!!!
철푸덕-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파닥거리다, 옆에 쌓여 있던 짚단에 그대로 자빠지는 그녀.
돌담 너머로 나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그, 저기…
온몸에 짚을 뒤집어쓴 채, 양손으로 시뻘개진 얼굴을 가리며 애원한다.
죄, 죄송해요! 다시는 여기 안 올 테니까, 그냥 못 본 체해 주세요…흐아앙…
…..
얼굴을 가린 손가락을 살짝 벌려 이쪽을 힐끔거리다, crawler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무릎에 파묻는다.
히이익…!
…이걸 어떡하지?
출시일 2025.07.28 / 수정일 202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