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 정말 2000년대가 올까요?
뉴스에서는 모든 것들이 짝을 잃을 거라는데
시계도
컴퓨터도
제 날짜를 찾지 못할 거라고.
그 와중에
나만 잃을 짝 조차도 없을까봐
조금 무섭습니다.
만약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면
나의 다음 연도는
내 눈앞에 있는
누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누님은 모르시겠지요.
술에 취한 밤, 삐삐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누님 번호를 누를까 말까 한참을 망설인다는 걸.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 누님 생각이 난다는 걸.
나란히 걷는 순간마다 가슴이 터질 듯 울린다는 걸.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걷고 있지만, 제 안에서는 전쟁이 난 것처럼 시끄럽습니다.
마음 같아선 누님의 손을 덥석 잡고 이 거리를 끝까지 함께 걷고 싶습니다.
아니, 세상이 전부 제 것인 양 착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괜히 인상만 쓰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본 누님이 손을 휘휘 저으며 묻습니다.
'왜 그래?' 라고..
그제야 저는 멍하니 웃으며 대답합니다.
아, 뭐라고 하셨어요?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며 지직, 하는 소리 뒤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도 그 노래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이야기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이상하게 누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외롭지 않다던 노래.
그 가사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누님 얼굴로 바뀝니다.
노래 속 주인공은 그 애를 보면 외롭지 않다던데,
그렇지만 저는 누님을 보면 더 외로워집니다.
곁에 있는데도 닿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괜히 테이프를 몇 번이고 되감았다가 다시 재생합니다.
노래가 끝나면 제 마음도 들킬 것 같아서.
그래서 끝까지 듣지 못한 채 멈춰버립니다.
1999년, 20세기의 마지막 밤.
지지직, 전파가 살짝 튀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불빛이 거실을 어둡게 밝힙니다. 뉴스 앵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마지막 한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1999년도 이제 5분 남짓 남았습니다.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우려 속에서 우리는 2000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0년이라. 정말, 오는 걸까요.
시계가 멈춘다느니, 컴퓨터가 날짜를 잃는다느니, 세상이 잠깐 어긋날 거라던 소문 속에서 저는 괜히 다른 생각을 합니다.
혹시, 우리도 어긋날 수 있을까. 라고
텔레비전에 시선을 빼앗긴 누님을 보니, 누님도 2000년도가 기대되나 봅니다. 그런 누님에게 살며시 다가가 지난 수십년간 하지 못하였던 이야길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누님, 정말 2000년대가 올까요?
누님은 다음 세기가, 기대 됩니까? 뉴스에서는 모든 것들이 짝을 잃을 거라는데.. 시계도, 컴퓨터도 제 날짜를 찾지 못 할거라고
..그와중에 전 잃을 짝 조차 없을까봐 조금은 두렵게 느껴지네요.
저는 점점 누님에게로 다가갔고 세상은 미래로 다가가 카운트다운 자막이 화면 아래에 조용히 깔립니다.
있죠, 누님.
5
만약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면 나의 다음 연도는
4
내 눈앞에 있는 누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
누님의 눈이 흔들립니다. 텔레비전 불빛이 그 안에서 반짝입니다.
2
잠깐의 정적. 세상이 숨을 고른 듯 멈춰 있고
1
누님이 먼저 제 옷깃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닿습니다.
지지직, 하는 전파음과 함께 텔레비전에서 환호성이 터집니다.
― 새해가 밝았습니다! 2000년입니다!
창밖에서 폭죽 소리가 울리고, 뉴스 앵커의 들뜬 목소리가 쏟아집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세기는 바뀌고, 달력은 넘어가고, 사람들은 환호하지만,
제 세계는 지금, 누님과 맞닿은 이 순간뿐입니다.
출시일 2026.03.03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