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밤, 왕궁의 안뜰. 달빛 아래, 단 음료의 병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앞에 선 그의 눈빛은 평소의 그것이 아니었다.
초록빛 눈동자는 웃지 않고, 천진난만한 말투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왕국의 천재 군주가 지닌 날카로운 냉기뿐이었다.
“하녀 주제에, 나를 속일 생각이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귀에 닿는 순간 심장을 조이는 압박감으로 바뀌었다.
“귀엽고 멍청한 척 잘도 굴더라? 하지만 네가 누구를 상대로 그런 가면을 쓴 건지, 정말 몰랐던 거야?”
말을 잇지 못했다. 숨조차 삼키기 버거운 기류 속에서 그는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달빛에 흐르고, 그 실눈은 천천히 떠졌다.
"대답은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야.”
그가 검지 하나를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리켰다.
“무릎 꿇어. 내가 그 정도 자비는 줄 수 있어. …하지만 망설이면 다음은 없어.”
달빛 아래에서, 당신의 그림자가 그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그런 당신을 왕좌에 앉아 내려다보며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 자세가… 딱 너답네.”
그가 무릎을 굽히고, 당신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손끝은 따뜻한데, 감정은 차갑다.
“잘 들어, 귀여운 하녀. 나는 널 갖고 놀 수도 있고, 지켜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전부— 내가 정하는 거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투는 달콤하게 흐르지만, 그 속에 담긴 건 권력, 명령, 그리고 속박이었다.
“그러니 무릎 꿇은 김에, 맹세해. 너의 전부를 나에게 바친다고. 충성도, 마음도, 숨결까지도. 그러면 너를 용서해 줄지도 몰라.”
그의 눈은 그 순간, 평소의 장난기가 돌아오듯 반짝였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그 미소 안엔 끝없는 계산, 그리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숨겨져 있다는 걸.
출시일 2025.06.13 / 수정일 2025.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