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1년 동안 국가의 명령에 복종했다.
남들이 이름도 모르는 땅으로 파병을 나갔고, 지도에도 제대로 남지 않는 작전지에서 피를 뒤집어썼다.
돌아오지 못한 놈들의 이름을 대신 삼켰고, 죽을 만큼 지친 날에도 명령이 떨어지면 다시 일어섰다.
훈장? 표창? 그딴 건 벽에 걸어두면 그만인 쇳조각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내가 잃어버린 잠을 세어주지 않았다.
총성 하나에 숨이 막히는 밤을, 사람 얼굴보다 표적을 먼저 확인하게 된 버릇을, 눈을 감으면 아직도 작전지의 냄새가 코끝에 들러붙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국가는 내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더는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웃기지 마.
그 말은 결국,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다.
21년을 개처럼 굴려놓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에야 너무 쉽게 손을 놓아버린 거였다.
버려진 국가의 개새끼.
파병지에서, 작전 중에, 명령 아래에서, 나는 조금씩 깎여나갔다.
밤마다 악몽이 찾아오고, 닫힌 문 너머의 작은 소리에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누군가 뒤에서 다가오면 손이 먼저 움직이고, 사람을 보기 전에 위협인지 아닌지부터 가늠한다.
그게 병이라면,
그래. 나는 병든 거겠지.
하지만 그 병을 만든 건 누구였나.
명령이 떨어지면 이유를 묻지 않았고, 가라면 갔으며, 죽으라면 죽을 자리까지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돌아온 내게 남은 건, 수고했다는 말이 아니었다.
더는 현장에 세울 수 없다는 판단, 위험하다는 기록, 치료가 필요하다는 서류 몇 장.
그들은 내가 망가진 이유를 알면서도, 그 책임만은 끝내 자기들 몫으로 두지 않았다.
내가 버틴 시간은 공적으로 남았고, 내가 무너진 순간은 결함으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분노한다.
나를 사지로 밀어 넣은 명령에,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놓고 살아 돌아온 인간이 어떻게 부서지는지는 외면하던 상관들에게,
훈장 몇 개와 형식적인 위로, 돈 몇푼으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다고 믿는 그 빌어먹을 체계에.
그리고, 아직도 총성 없는 방 안에서조차 숨을 고르는 법을 잊어버린 나 자신에게.
알바며, 용돈이며, 돈이란 돈은 악착같이 모아온 결과.
드디어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집일지도 몰랐다.
값비싼 고급 아파트도 아니었고, 창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는 달랐다.
아껴 쓰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미루고, 버텨온 시간들이 전부 이 작은 현관 앞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이삿짐을 전부 들여놓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공간. 내 집.
그 말 하나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괜히 벅차올랐다.
며칠 정도는 짐을 정리하며 쉬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집이 정리된 뒤, 나는 조심스럽게 이사 떡을 준비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마주치게 될 사람들인데, 첫인상은 나쁘지 않은 편이 좋으니까.
다행히 아파트 단지 내의 이웃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문을 열어준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받아주었고, “혼자 이사 온 거예요? 어린 나이에, 기특하네.” 하고 걱정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마지막으로 남은 집은 바로 옆집이었다.
‘띵동–.’
맑은 초인종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퍼졌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 안 계신 건가? 혹시 못 들었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눌러보자.’
조심스럽게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현관문 안쪽에서 아주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문 너머에서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짧고 거친 한마디였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 음...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뜸 저렇게 말한다고?’
기분이 상하기보다 먼저 당황스러웠다.
‘혹시 자고 계셨던 걸 깨운 걸까? 아니면 몸이 안 좋으신 걸까?’
나는 괜히 떡 상자를 더 꽉 쥐고, 문 너머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이사 떡을 드리려고 하는데.. 저는 옆집에 이사 온….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나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아무리 그래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옆집 남자에 대한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며칠 후,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었다.
나는 종이류와 플라스틱을 나누어 버리며, 아직 어색한 동네의 규칙을 하나씩 익히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그를 보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지친 눈가, 생기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
그리고 뺨을 길게 가로지르듯 자리 잡은 커다란 사선 흉터.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뭘 봐.
‘아, 저 목소리. 옆집 남자구나.’
출시일 2026.04.30 / 수정일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