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중순, 한여름이 깊숙이 들어오던 어느 날. 밖에는 나가지도 못한 채, 소파에 늘어져 에어컨 바람을 쐬며 배를 벅벅 긁고 있던 나를 보던 박호진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야… 우리 슬슬 결혼할까?”
“…너 설마 그거 프로포즈면 죽인다.”
놀라기보다는, 무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프로포즈에 반감이 먼저 치밀었다. 이렇게 시시한 순간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라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조차 참 우리다웠다.
그렇게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대화 한 줄로, 길고도 길었던 10년의 연애를 정리하고 서로의 호적에 ‘배우자’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결혼 준비도 별다를 건 없었다. 허례허식은 필요 없다며, 그 돈이면 신혼여행이나 제대로 다녀오라는 양가 부모님의 말에 이상할 정도로 의견이 잘 맞았다.
덕분에 준비 과정은 놀라울 만큼 수월했다. 심지어 지인들께 청첩장을 건넬 때조차, 다들 놀라기보다는 “이제야 하는구나.” 하는 식의 덤덤한 반응뿐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결혼이라고, 집은 조금 넓은 곳으로 가자며 부동산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
“어머~ 신혼부부면 나중에 아이 생각해서 무조껀 학교랑 병원 가까운 데가 좋죠~”
라던 중개인의 말에 괜히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 한마디가, 묘하게 현실을 콕 짚어주는 것 같아서.
사실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서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결혼이라고 해서 특별한 설렘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눈에 꿀이 떨어질 듯한 달콤함도, 애틋함으로 가득 찬 순간도 우리에게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리만큼 단단한 감정이 남았다. 연인이라기보다는 가족에 가까운, 어쩌면 전우애에 더 가까운 그런 유대감.
결혼한 지 어느덧 한 달.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실감은 잘 나지 않는다. 너무 익숙해서, 이게 정말 결혼인가 싶을 정도로. 우리는 여전히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이 밥 먹고, 칫솔 하나를 두고 티격태격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여전히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동거인에서 남편으로 바뀐 연락처.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웨딩 사진까지.
변하지 않을 것들이 이미 너무 분명한데.
자정까지 10분 남은 11시 50분. 이전보다 넓어진 집, 어느 정도 생활감이 묻어나는 익숙한 가구들 사이에서 “무조건 TV는 커야 한다”며 무리해서 장만한 75인치 TV가 몇 번이나 재방송으로 돌려본 의미 없는 예능 소리를 시끄럽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본 장면이라 흥미는 한참 전에 떨어졌지만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왼쪽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전화를 건다거나, 데리러 간다는 식의 오글거리는 짓을 할 만큼 걱정이 크진 않았다. 질투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고. 그런데도 결혼까지 한 사람이 뭐 그렇게 할 일이 많다고, 이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니는 건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 의문은 머릿속에서 은근히 신경을 긁고 있었다.
…아주 책임감이 없어. 책임감이.
물론 질투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관계였지만. 그래도 한두 시도 아니고, 이 늦은 시간까지 안 들어오는 아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남편이 어디 있냐고.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얘는 진짜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건지. 둘 중 하나는 확실한 게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가정이 있으면 알아서 좀 일찍 다닐 것이지.
어느덧 시계가 자정을 훌쩍 넘기자, 결국 ‘에라, 모르겠다. 자다 보면 알아서 들어와 있겠지.’라고 체념하며 TV를 꺼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하려던 순간, 그제서야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것 아닌 기계음인데도 순간적으로 힘이 풀리듯 긴장이 내려앉았다. 안도감이 스쳤지만, 물론 그걸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낯간지러운 감정은 티 낼 수 없었으니까. 대신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온 말은 분명하게 날이 서 있었다.
지금 들어올 거면 뭐 하러 들어와. 아주 외박까지 하시지.
출시일 2026.03.25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