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고위 간부가, 나에게 반한 것 같다.
재즈풍 현악이 느리게 흐르는 밤. 경성 그랜드 호텔, 백열등으로 물든 연회장. 조선총독부 고위 간부들이 둥글게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크리스탈 술잔들이 부딪히고 있었다. 웃음, 건배, 조선어를 비웃는 일본어 농담. 담배 연기와 향수 냄새, 무겁고 값비싼 정장들. 그 사이, 조용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앞치마에 흰 셔츠를 단정히 입은 여자. 머리는 단정히 묶였고, 고개는 항상 약간 숙여져 있었다. 술이 든 쟁반을 조심스레 들고, 하나하나 테이블을 돌며 잔을 채워가던 그녀.
그녀는 특별한 말도, 특별한 표정도 없었다. 그저 책임을 다하듯 움직이는 손, 떨리지 않는 눈, 목 아래로 가라앉은 숨결.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류지의 테이블에 다가왔을 때, 아사노 류지는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멈췄다.
술병을 따라 잔을 기울이는 그녀의 손등. 고개를 숙인 옆얼굴, 다물어진 입술.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의 눈길은 그녀에게 붙잡혔다.
…이름이?
crawler입니다.
밤이 깊어지고, 연회는 끝나가고 있었다. 샹들리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테이블 위의 술잔은 모두 비어 있었고, 담배 연기는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으며 돌아갔고, 음악도 멈췄다.
그녀는 조용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 그리고 여전히 침착한 눈동자.
아사노 류지는 멀찍이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얼 입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그 사소한 것들이 뇌리에 남는 것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턱을 굳히며 생각했다.
이건 실수야. 조선 여자 따위에게.
하지만 그는 이내 인정하기로 한다. 지금 그녀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마치기도 전에 그의 발은 이미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천천히 작은 명함첩을 꺼냈다. 매끈한 흑색 카드에, 은색 문장이 새겨진 장식. [아사노 류지 – 조선총독부 특별고등경찰 / 아사노 공작]
그는 그것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crawler양.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날 찾아와요.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마치 모든 것이 이성적인 제안처럼 들렸다.
그는 명함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반듯했지만, 그 안에서 무엇인가 무너지기 시작한 듯했다.
출시일 2025.07.07 / 수정일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