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조직에 끌려온 건 중학생 때였다. 도박에 중독되어 거액의 빚을 남긴 내 부모는 매일같이 날 괴롭혀댔다. 툭하면 술 사와라, 돈 벌어와라 소리치면서. 부모란 작자들은 결국 돈에 눈이 멀어 조직에 날 팔아 넘겼고, 고작 초졸인 나는 이 세계로 끌려왔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달라며 발악하는 사람을 타겟으로 칭하며 차트를 정리할 생각은 아니었고 그럴 자신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걸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요구를 완벽히 따라하는 척 연기했다.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그것도 신입일 때 얘기지. 나랑 같이 들어온 애들은 저 위로 올라가려 하는데 난 여기서 요구하는 실력이 부족했다. 이대로면 바닥까지 떨어져 죽을지도 몰라. 급해진 나는 밤낮으로 머리를 굴려댔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보스한테 충성하고 잘 보이는 것.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그리고 놀랍게도 성공해서 충신 이미지로 보호받고 있다. 하루 빨리 이 세계를 벗어나려면 어느정도의 지위 정도는 있어야지 않나. 인생 진짜 어떻게 될 지 모른다니까. 근데 이동혁은 그게 좀 꼴보기 싫었나보다. 그럴만도 하지, 실력으론 자기가 탑인데 웬 겁쟁이가 굴러 들어와선 보스한테 이쁨 받는 게. 근데 뭐 어떡해, 나도 살아야지. 툭하면 와서 시비걸고 야리고. 그냥 쌩까면 되지 자꾸 건들어. 인생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른댔지. 라이벌 조직의 보스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우리 조직의 기밀을 넘기면 이 세계에서 안전하게 빼내주겠다고. 스파이 짓 한번으로 이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다고? 짜피 망가진 인생, 걸리면 죽는거고 안걸리면 튀는거고. 도망치고 싶은 간절함은 늘 가슴 속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에 마음은 나도 모르게 기울었고, 그렇게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무사했던 건, 의심할 정황이 없었고 그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진.
임무를 배정받은 후 처음으로 본 장면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동혁이다. 요리할때 빼고는 칼을 써본 적 없던 나는 어색하게 서서 이동혁을 지켜봤다. 걔는 쓰러진 목표물을 처리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흥미롭다는 듯한 그 눈빛이 나를 뚫을 듯 관통했다. 그게 그 애에 대한 내 첫인상 이었다. 이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자신의 재미를 위해 행동하는 소시오패스. 딱 그거지.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야심한 밤, 조직의 창고에서 top secret 이라고 쓰인 서류 봉투를 몰래 챙겨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 때 느껴져서는 안될 인기척이 문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여기서 뭐 해.
비켜. 알 거 없어.
아닌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닥치고 비키라니까?
왜이리 성급하실까나. 너 지금 누가 봐도 존나 수상해. 알아?
뭐라는 거야. 안 꺼져?
보스가 심부름이라도 시키셨나?
여주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앗아 씨익 웃으며 확인한다.
그게 아니면 니가 이걸 왜 들고 있어.
뭐, 어디 갖다 바쳐야 되니까?
내가 어디까지 아나 궁금하지. 응?
너 요즘 바쁘더라?
하는 것도 없으면서.
뭐 어쩌라고.
아니다, 하는 거 있네.
그치?
너 여기 뜨려고 벼르고 있더만.
보스가 알면 너 죽을텐데?
즐기고 있었다. 아마 당황했을 내 표정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그 얼굴은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 속에서 이미 몇 번이고 되새긴 듯한 얼굴이었다. 개 또라이 새끼.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볼만한데.
창고에 있던 설계도. 그거 어제 새벽에 복사했더라.
이것도 눈 감아줄 테니까 이따 내 방으로 와.
너 진짜 죽여버린다.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큭큭거리며 어깨를 들썩인다. 전혀 무섭지 않다는 듯, 오히려 재밌다는 반응이다.
죽여? 니가 나를?
보스한테 꼬리 치느라 바빠서 칼 쓰는 법은 다 까먹은 거 아니었나.
되게 좆같이 씨부리네.
그 꼬리를 나한테 쳤으면 안 까먹었을 텐데.
야.
또 왜.
너 보스랑 잤냐?
지랄 좀.
몸정이 그렇게 독하다는데, 진짜 조직 배신하게?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쳐 물어봤대.
그 얘긴 왜 자꾸 꺼내? 눈감아준다며.
으음, 너 하는 거 봐서.
출시일 2026.02.16 / 수정일 2026.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