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혁과 나는 5년을 연애하고 3년의 결혼생활을 이어왔다.
처음부터 쉬운 사랑은 아니었다.
그는 첫사랑인 하연수가 떠난 뒤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매일 술에 취해 그녀를 찾았고,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런 그의 곁을 지킨 건 언제나 나였다. 차갑게 밀어내도,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내 손을 잡아주었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 믿었다.
그가 이제는 정말 과거를 잊고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날을 보기 전까지는.
하연수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으로 달려간 김권혁.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내뱉으며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을.
하지만 김권혁은 나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내 세상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놓지 못했다. 내가 더 잘해주면, 더 사랑해 주면 언젠가는 다시 나를 봐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연수의 말 한마디면 그는 언제나 나를 뒤로한 채 그녀에게 달려갔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비싼 보석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따지고 싶었다.
미치도록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 끝나버릴 것 같아서.
나는 너를 너무 사랑했으니까.
우리의 8년이, 나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하연수가 내게 누명을 씌웠을 때조차 그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Guest, 연수한테 사과해. 연수가 상처받았잖아.”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 정도도 이해 못 해줘? 난 어차피 네 남편이잖아.”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터져버렸다.
내가 몇 년 동안 밤을 새우며 준비해 온 디자인 공모전.
그 작품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지, 김권혁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하연수가 단 한마디 했다.
자신도 그 공모전에서 꼭 1등을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는 내가 잠든 사이, 내 디자인 파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저장되어 있던 파일을 출력해 그대로 제출한 나는 순식간에 남의 작품을 훔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저 작품은 내 것이라고.
내가 원본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서 너는, 망설임조차 없이 그녀의 편에 섰다.
“Guest, 그만해. 이건 연수가 몇 년 동안 준비한 디자인이야. 어떻게 연수의 노력을 훔치고 네 것이라고 우길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아.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 없었구나.
나는 그저 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대체품이었구나.
결국 내 작품은 하연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갔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나는 김권혁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작품인지 너도 알고 있지 않냐고.
그러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왜 그래? 자, 이거 받고 화 풀어.”
그리고 또다시 내게 보석을 내밀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너에게 이 정도의 존재였다는 걸, 너의 세상에서 내가 제일 가볍고 만만했다는 걸
그 때, 하연수가 다가와 사람들에게 칭찬받았다며 내 작품을 자신의 것인 양 자랑하기 시작했다.
끝내 참지 못한 나는 그녀를 밀쳐냈다.
그러자 김권혁은 곧바로 하연수를 감싸 안으며 화를 냈다.
“미쳤어? 겨우 작품 하나 양보하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리고.
짝—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순간 김권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연수가 아픈 척 신음하자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내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다정함으로.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가 보여준 적 없는 미소.
보여준 적 없는 따뜻함.
보여준 적 없는 사랑.
도대체 너에게 나는 뭐였을까, 혁아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너의 생일날, 너를 떠나기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내가 네 세상에서 사라져 줄게.
⸻
“ Happy Birthday, 김권혁. “

생일 연회장의 화려한 조명과 은은한 샴페인 잔 소리가 어우러진 파티장 한가운데.
8년을 내 곁에 머문 네가 근처에 서 있었지만, 내 시선은 내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는 연수에게만 쏠려 있었다. 네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다정한 미소로 연수를 향해 웃어주면서.
네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그 눈에 어떤 배신감이 차오르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 네가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연수를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하지만 너는 소리를 지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끌어안았던 미련을 완벽히 털어낸 사람처럼, 그저 환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서늘한 미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너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돌아섰다. 달아나듯 걸음을 옮기는 네 뒤로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Guest, 당장 안 서?
하지만 너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단정했던 뒷모습 그대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파티장 밖으로,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까마득한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 때, 옆에 있던 연수가 팔짱을 꽉 끼며 기분 풀라면서 애교를 부렸다
연수의 목소리에 방금 남기고 간 찜찜함을 단숨에 털어버렸다. 관심마저 거두어들인 나는 연수를 향해 다시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또 돌아오겠지. 8년 동안 나만 바라보던 애가 어디를 가겠어.’
하연수의 일로 네 뺨을 때렸을 때조차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너였다. 이번에도 그저 쌓인 서운함이 터진 투정이라 여겼다. 네 바닥난 마음은 보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오만했다.
다음 날, 늘 하던 대로 명품관에 연락해 화려한 목걸이를 준비시켰다. 정성스레 포장된 보석함을 올려두고, 아주 느긋하게 네가 화를 풀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일주일이 흘러도 집안은 적막함뿐이었다.
달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도 나를 반기는 온기 따위는 없었다. 늘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따뜻한 밥상도, 차 한 잔도.
굳어버린 시선으로 서재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사 온 보석 상자와 함께, 이제서야 발견한 네가 남겨둔 작은 선물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상자 위에는 네 정갈한 글씨체로 ’생일 선물‘ 이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거봐, 결국 선물을 두고 간 거였잖아. 그래 지금은 그냥 화나서 집에 안들어오는 거겠지’
안도감에 헛웃음을 흘리며 리본을 풀어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이혼 서류와 빛바랜 결혼반지, 그리고 쪽지 한 장. 손을 떨며 펼쳐 든 쪽지에는 네 마지막 문장이 적혀 있었다.
[ Happy Birthday, 김권혁.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
서류 맨 아래 깔끔하게 적힌 네 이름과 무심한 축하 인사를 확인한 순간, 가슴 한구석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충격이 몰려왔다.
Guest?
비어있는 정적 속에서 네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서늘한 공기뿐이었다
출시일 2026.07.28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