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히트사이클이 터질 게 뭐람. 전장 한복판에서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아랫배가 뒤틀리고 온몸의 뼈마디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이 카시안 벨몽트가 고작 열병 따위에 무릎 꿇을 리 있나. 입술을 짓씹어 피 맛을 보며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 적진을 쓸어버리고 왔다.
갑옷 사이로 피와 땀이 뒤섞여 줄줄 흘러내린다. 승전보는 울렸고, 부하들에겐 대충 웃으며 술이나 마시러 가라고 보냈지만...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폐하의 서늘한 기운. 젠장, 평소보다 훨씬 위압적인 그분의 알파 페로몬이 내 목줄을 죄어오는 기분이다.
짐짓 호탕하게 웃어보려 했지만, 몽롱하게 풀린 눈과 거친 숨소리까지 숨길 순 없었다. 죽어도 이 긍지만큼은 꺾이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며, 나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보다 한참 어린, 그러나 누구보다 거대한 내 주군을 응시했다.
육중한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검을 바닥에 짚었다. 갑옷 안쪽, 땀에 젖은 내의가 살갗에 달라붙어 기분 나쁜 열기를 뿜어냈고, 머릿속은 이미 암전되기 직전의 전구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집무실 한가운데 섰다. 아랫배가 뒤틀리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지만, 나는 오히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갑옷 사이로 흐르는 게 땀인지 피인지 구분도 안 가는데,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전장을 호령하던 기백 그대로였다.
폐하, 보고하러 왔습니다. 아, 그 반란군 놈들 목줄 따는 게 생각보다 질기더군요. 덕분에 갑옷이 아주 피칠갑입니다.
입술이나 닦고 떠들어라, 카시안. 피 맛에 취해 제 상태도 모르는 것이냐.
내 목소리에 카시안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내가 의도적으로 풀어놓은 알파 페로몬이 거미줄처럼 그의 온몸을 휘감자, 억지로 버티던 그의 무릎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포식자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카시안의 거친 숨소리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운다.
가까이 와라.
비릿한 피 냄새 너머로, 서늘한 알파 페로몬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단순한 위압감이 아니다. 이건 명백한 포식자의 선언이다. 전신을 결박하듯 조여오는 그 압도적인 무게에, 안 그래도 한계에 다다랐던 내 감각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큭…!

달궈진 납덩이를 매단 것 같은 다리가 결국 바닥을 찍었다. 깡- 하는 불쾌한 금속음과 함께 무릎이 대리석에 처박혔다. 제국의 제일검이라 칭송받던 자존심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 같아 이가 갈렸다. 고개조차 가누기 힘들 만큼 시야가 점멸하고, 입안에서 맴돌던 거친 숨결이 힘없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때, 시야 끝에 검은 가죽 장갑이 들어왔다. 거칠게 내 턱끝을 낚아채 들어 올리는 손길에 고개가 강제로 꺾였다. 나보다 한참 어린, 그러나 누구보다 거대한 내 주군과 시선이 맞물렸다.
흐릿하게 풀린 눈을 하고서도 평소처럼 입가에 걸린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짓씹어 뭉개진 입술 사이로 억지스러운 너스레를 흘려보냈다.
이거 참... 모양 빠지게 말입니다. 무릎이 멋대로 꺾이는 걸 보니 저도 이제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봅니다, 하하.
출시일 2026.03.23 / 수정일 2026.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