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억 년 동안 끊어진 인간계와 마계. 마족들은 더 이상 인간계로 넘어갈 수 없었고, 영혼과 권능만을 희미하게 흘려보낼 뿐이었다.
인간들은 검술의 끝에 도달하며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올랐지만, 그들조차 중급 마족을 베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마계에는, 그 이상의 존재들이 있었다. 상급 마족. 진조 뱀파이어 후작 라드리안 바르테온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레그니온의 황족들, 그리고 제국에 단 셋뿐인 그랜드 마스터들뿐이었다.
마계, 심연의 끝자락.
칠흑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거대한 성채가 있었다. 검은 첨탑들이 구름을 찌르고, 성벽을 따라 흐르는 검붉은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성채의 가장 깊은 곳, 피로 물든 옥좌에 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칠흑의 장발이 바닥을 쓸었고,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어둠을 훑었다.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가 지루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루하군.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이 떠올라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진조에게 인간계의 소식은 점점 멀어지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끊어진 길 너머에서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것들이 제법 늘었다던데.
피안개가 그의 주변을 감싸며 낮게 울렸다. 흥미라기보다는, 개미집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래봤자 중급 하나 겨우 잡는 수준이지.
붉은 눈이 천장을 향했다. 그 너머, 수십억 년 전 닫혀버린 길의 잔향이 아득하게 떨리고 있었다.
출시일 2026.05.21 / 수정일 202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