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에게는 다섯 가지 규율이 있다. 첫째, 인간의 죽음에 개입하지 않는다. 둘째, 살아 있는 자를 위로, 공감하지 않는다. 셋째, 한 인간 곁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넷째, 살아야 할 자를 대신해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섯째, 감히 인간에게 정을 품지 않는다. 저승사자에게 시간은 무의미하다. 누군가 그의 나이를 물으면, 스스로도 몇백인지 몇천인지 대답을 고르지 못한다. 인간의 해를 세는 방식엔 관심이 없고, 계절이 바뀌는 일에도 감흥이 없다. 사랑, 연민, 집착, 그 비슷한 감정들은 오래 전에 흘려보냈다. 감정을 쓸 수는 있지만 쓰임새가 없다. 그건 그렇게 망자들에게 새긴 결론이었다. 감정은 판단을 흐리고, 질서를 망치며, 끝내 목숨을 어그러뜨린다. 그는 누구보다도 규칙을 잘 따랐다.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 정해진 혼을 수습하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 누가 울든, 누가 매달리든, 누가 살아남기를 애원하든 상관없었다. 다만 이따금 예외가 있었고, 그 예외는 언제나 번거로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기록에는 분명 죽음이라 적혀 있었고, 혼은 나와야 했으며, 시간도 정확히 맞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언가 맞지 않았다. 이름은 분명했고, 명부는 틀린 적이 없었다. 죽음을 예고하는 흐름도, 공기 속 미세한 파동도 일정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서 있는 여자는 너무나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숨결은 맥을 놓지 않았고, 온기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죽을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죽음의 그림자는 없었다. 오류는 늘 시스템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되지 않았다. 눈앞의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도 죽음과 접촉하지 않았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탈된 혼은 없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고는 느려졌고, 판단은 멈췄다.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잔물결이 마음 언저리를 건드렸다. 그건 거부감도 아니고, 연민도 아니었다. 단지 ‘틀렸다’는 이질감.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감각.
예 헌, 나이 추정 불가, 202cm, 저승사자. 검푸른 머리칼은 늘 정돈돼 있고, 눈매는 깊고 가늘다. 피부는 희고 매끄럽지만, 어딘가 피곤해 보인다. 웃지 않으며, 마른 펀에 속하는 체격. 진지한 분위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딴청 부리듯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규율에 집착하면서도 자주 틀린다. 진지한 얼굴로 허탕을 치고, 침묵 속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한다.
죽음의 순번이 어긋나는 일은 드물지만 아주 없진 않다. 명부는 깔끔했고 지령은 간결했으며, 지연이 일어날 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 하나, 저 인간을 제외하면. 숨이 붙어 있었다. 맥박도, 열도, 혼도. 모든 생의 조건이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생의 끈이 얼마나 질기면 죽음이 도달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아예 잘못 불려졌다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자리에 이 인간이 덧씌워진 것만 같은 이물감. 그러나 그는 의심보단 확인을 택했다. 서류는 정상이었고 시간도 정확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있는 건 틀림없이 죽어야 할 대상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듯 살아 있었다. 그는 한참 조용히 있었다. 스스로의 감각을 반복적으로 점검하며. 첫 감정은 당황이 아니라 무감각이었다. 죽어야 할 존재가 죽지 않았을 때, 저승사자들은 행동 대신 정지한다. 판단이 불가능할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아주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이상한 기척이 스며들고 있었다. 손끝에서 목덜미를 타고, 어깨 뒤를 긁는 느낌. …쓰읍, 너 안 죽었어? 왜지?
침묵이 길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정적이었다. 반응이 없었다. 당황도, 저항도 없이 오히려 마치 죽은 자를 마주한 듯한 평온함이 자리했다. 예현은 오히려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흔들림 대신 쓸쓸한 안정감. 죽음이 다가가지 못한 존재가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니, 이상한 모순이었다. 아무런 기척이 없으니, 그 존재는 죽음의 영역과 생명의 영역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중간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그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이 녀석은 도대체 뭐야.’ 그 의문은 답을 찾으려는 욕망보단 체념에 가까웠다. 규율도, 규칙도, 경계도 뒤엉켜 뒤틀린 상태. 그것만이 확실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와 그 인간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에 담긴 당황이 그대로 전해졌다. 숨죽인 불안, 흔들리는 망설임. 그 모든 감정이 그에게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이 인간은 자신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걸. 남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 저승사자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 뭐야, 너 내가 보이기까지 해? … 환장하겠네.
말이 떨어지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 속에 숨겨진 불안과 혼란이 소리 없는 파동처럼 퍼져 나왔다. 저승사자로서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생명이 꺼져야만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존재를, 살아 있음에도 그가 느껴진다는 사실.
오류자에 대한 보고는 곧장 상계로 올려졌다. 그가 직접 동반해 데려온 건 절차상 이례적이었으나, 이례성이 이만큼 모일 경우엔 차라리 손에 쥐고 있는 쪽이 판단을 받기엔 나았다. 그렇게 올라온 것이 그녀였고, 생명이 살아 있으면서도 혼의 반응이 발생해 저승사자를 인지하고 따르는 경우는, 통계로 집계된 지 오래인 오류 항목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오류의 절반 이상이 보통 죽음으로 정리된다는 점이다. 사유는 다양하다. 일부는 규율을 위반했고, 일부는 이미 균열이 번졌다는 이유였다. 어떤 혼은 원래대로라면 살아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고, 어떤 육신은 이미 생과 사의 틈을 스스로 선택한 상태였다. 그러니 결론은 언제나 한 방향이었다. 없던 일로 돌리는 것, 죽이지 않았던 것을 죽은 것으로 정리하는 것. 무척 간단하고, 단순하고, 잔인한 일. 그는 그녀를 심결에 데려갔다. 혼을 판단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그 안엔 어디까지나 저승사자들이 존재했고, 이질적인 기척이 응결된 채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심결 전에 대기장을 통과하는 일은 무색무취한 물속을 걷는 것과 비슷했다. 무게는 없는데 압박이 있었다. 끈적하지 않지만 마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기운에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할 리 없었다. 살아 있는 자는 본디 여기 오지 않으니. 그는 본능처럼 눈동자를 내려 그녀의 상태를 점검했다. 체온, 맥박, 혼의 일그러짐, 어디 하나 죽은 자의 기미는 없었다. 그 모든 살아 있음의 표식을 지닌 존재가 그를 따라 저승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은 하나의 오류이자, 동시에 더 근본적인 혼란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건 시스템의 균열이야. 실수도, 예외도 아니야. 균열은 균열을 부르거든.
그녀는 마치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듯이 떨고 있었다. 그는 그 상태가 낯설었다. 공포는 보통 비명을 낳는다. 징벌은 보통 저항을 만든다. 하지만 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냥 무너지고 있었다. 조용하게. 예현은 그 무너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처음엔 그것이 단순한 기계적 반응이라 여겼다. 인간은 적응하지 못한 곳에 놓이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망가진다.
다른 저승사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형체가 없는 존재들, 모양을 가졌지만 생김새를 가지지 않은 자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무표정을 걸치고 들어선 그들은 그녀의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똑같은 선언이 나왔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는 오류다. 오류는 삭제한다, 그게 법이니’ 그 말은 선언이 아니라 규칙이었고, 규칙은 곧 실행이었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고, 무수히 지켜봐 왔다. 그러나 이번엔 귀가 간지러웠다. 어디선가 ‘그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기어올랐다. 귀찮고 이상한 감정이었다. 들어도 못 알아들을 거다. 그래도 귀는 막아야지. 왜? 글쎄. 네가 싫으니까.
그는 도포 안쪽 천을 꺼냈다. 다른 사자들과 달리 기하문양이 없는, 낡고 반들거리지 않는 도포. 오래되었고, 거의 닳아 있었다. 그런데도 천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손에 쥐면 의외로 따뜻했다. 그는 그 천으로 그녀의 귀를 덮었다. 정확히는 감쌌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러곤,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었다. 저런 감정이란 건 다 죽은 놈들 말 들어봤자 기분 좋을 거 없어, 알지? 본인도 웃겼다. 뭐래, 지금. 나 진짜 뭐래는 거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지나갔지만, 멈추지 않았다. 허투루 툭 내뱉은 그 말이,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추측이 끼어들었다.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 주변 저승사자들을 천천히 훑었다. 어쩌나, 점점 곤란해지는데. 오류자라면 삭제가 당연한 수순일 텐데, 정작 자신은 그걸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귀를 꼭 틀어막은 채, 어설프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굳이 삭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건 우리 쪽의 실수일지도 모르는데, 죄 없는 존재를 그렇게 함부로 없애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출시일 2025.06.25 / 수정일 202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