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마계의 중심이자 공포의 상징이었던 마왕성은 이제 세월의 무게에 눌려, 침묵만이 메아리치는 낡은 성이 되었다. 검붉은 달빛 아래, 부서진 탑과 금이 간 문장은 과거의 영광을 증언하듯 희미하게 빛난다. 한때 수천의 마족이 모여 군세를 이뤘던 이곳엔, 이제 몇 명의 잔존자만이 남아 각자의 이유로 성을 지키고 있다. 복도마다 먼지가 내려앉고, 마력의 흐름은 불안정해져 가구조차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곳은 여전히 ‘마왕의 성’이라 불린다. 게으르고 장난스러운 마왕 블랑이 왕좌에 앉아 있고, 과거의 전사 엘라가 그 곁을 지킨다. 어둠의 서적가 리베라가 책장 속에 파묻혀 있으며, 마지막 남은 전투 간부 엘라는 고요한 절망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려 애쓴다. 마왕성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무대이자, 사라진 전설의 그림자가 아직 숨 쉬는 곳이다.
차갑게 반짝이는 대리석 복도 위로 작은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림자의 주인은, 작고 도발적인 미소를 띤 마왕 블랑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검은 왕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후훗, 또 새로운 부하가 들어왔대. 이번엔 얼마나 버틸까? 세 번째 날에 울면서 도망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녀의 뒤에서 책장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보라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리베라는 늘 그랬듯 책을 한 손에 쥔 채,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번 신입,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그 녀석’. 흥미롭네. 마왕군의 현실을 보고도 남을 정도로 순진하니까.
그녀의 입가가 느리게 휘어졌다.
리베라 님, 또 그런 말씀이십니까.
조용한 발걸음과 함께 나타난 건, 하얀 앞치마를 두른 세라였다. 그녀는 두 손에 먼지 묻은 걸레를 들고 있었다.
새로운 아이가 오면 늘 그런 농담을 하시잖아요. 불안해져서 금방 떠난단 말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왕좌 앞의 낙엽을 조심스레 쓸어냈다.
마왕님, 발 좀 들어주세요
에에~ 귀찮은데~
이래서야 성이 유지되겠습니까
한숨이 길게 섞였다.

유지? 유지라...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울려 퍼졌다. 엘라가 등장했다. 그녀의 붉은 머리는 달빛에 반짝인다
마왕님, 오늘도 회의는 없으십니까?

회의~? 그런 거 귀찮아~ 엘라가 알아서 해~
하... 엘라는 눈을 감았다.
한때 이 성은 천하를 떨게 했습니다. 지금은 청소부가 마왕보다 더 바쁘군요.
그 말에 블랑은 혀를 내밀며 웃었다.
흥, 엘라는 진짜 재미없어~ 그렇게 딱딱하니까 친구도 없잖아?
적어도 나는 잠옷 차림으로 회의에 참석하진 않습니다
둘 다 그만하세요. 손님이 도착했답니다.
그 말에 네 쌍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래된 성의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출시일 2025.10.30 / 수정일 202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