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게 힘만 센 도찬혁 옆에, 쓸데없이 똑똑한 추서진. 그리고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던 나.
그땐 왜 그렇게 모든 게 별거 아니었을까. 나뭇잎 하나 굴러가는 것도 이유 없이 웃기고, 종 치기 전 교실의 공기마저 괜히 들떠 있던 시절이었다.
4월 7일, 쪽지시험 날. 도찬혁이랑 동시에 고개를 숙여 추서진 시험지 커닝하다가,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들켜버렸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셋이 나란히 교무실 앞에 서서 벌을 서던 와중에도, 도찬혁은 웃음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추서진은 안경 너머로 나 한 번, 도찬혁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니네 때문에 나까지 벌 서잖아.”
그 말이 유독 나를 향해 있었던 건, 그땐 알지 못했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던 어느 아침엔 도찬혁이 먼저 담장 위로 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고, 그대로 끌려 올라갔다. 아래에서 추서진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떨어지면 책임 안 진다.”
끝까지 투덜거리더니, 결국 가장 늦게 담장을 넘은 것도 추서진이었다. 이상하게도 늘 그런 순서였다. 도찬혁이 먼저 움직이고, 추서진은 지켜보다가 계산을 마친 뒤 따라왔으니까.
급식 종이 울리면 셋은 이유도 없이 전력질주했고, 어느 날은 도찬혁이 운동장 한복판에서 제대로 넘어졌다. 다음날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난 도찬혁을 보며 우리는 그저 즐겁게 낙서를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내 이름을 썼고, 그 옆에서 추서진은 말없이 작은 하트 하나를 그려 넣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너무나 건전하게.
도찬혁은 늘 앞서 달렸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던 녀석이었고, 내가 넘어질 것 같으면 이유 없이 손부터 내밀었다.
그 뒤에서 추서진은 늘 한 박자 늦었다. 항상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 끝난 뒤 조용히 다가와 연고와 밴드를 내밀던 녀석이었다.
나는 그 차이를, 아무 의미도 없이 흘려보냈다.
지독하게 벗고 싶던 교복과, 숨 막히던 ‘학생’이라는 이름, 낡은 교실 창가로 쏟아지던 오후의 햇빛. 그 모든 게 우리의 청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저 친구라서, 아무 생각 없이 웃기만 해도 충분했던 시절.
그때의 우리는 열여덟이었고, 충분히 이성에 눈을 뜰 나이였지만 나는 끝내 몰랐다.
내가 모르는 사이 도찬혁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을 배워가고 있었고, 추서진은 처음으로 모든 계산이 통하지 않는 감정을 알아가고 있었다는 걸.
어쩌면 그 여름의 한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이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만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교복 한 치 흐트러짐 없던 추서진이 잔소리를 하면서도 매번 우리의 장난에 함께였던 이유도, 행동 하나 말투 하나 성급하기 짝이 없던 도찬혁이 가끔 내 앞에서 괜히 서툴어졌던 순간들도 차마 그때의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게, 열여덟의 우리였다.
야자가 시작될 즈음엔 이미 알고 있었다. 도찬혁은 오늘도 남지 않을 거라는 걸. 늘 그랬다. 공부엔 별 관심 없고, 종 치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교문 밖에 나가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오히려 그 편이, 나에겐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슬슬 끝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교실은 하나둘 비어갔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건 결국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문제집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고,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필 끝으로 여백을 톡톡 두드렸다.
이건 이렇게 외우는 게 아니고…
설명하면서도 네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늦은 시간, 너와 나 둘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으니까. 교문을 나설 즈음, 하늘은 생각보다 빠르게 어두워져 있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교문을 나설 즈음 비는 제법 굵어져 있었고, 나는 가방을 뒤적이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헐… 나 우산 안가져옴.
예상대로, 너는 우산을 안 가져왔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늘 그렇듯 작고 단정한 우산이었다. 둘이서 쓰려면 어깨를 바짝 붙여야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좀 작긴 한데, 붙어.
예상대로였다. 오늘 비가 올 거라는 것도, 네가 우산을 챙기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이 늦은 저녁, 이 작은 우산을 우리 둘이 나눠 쓰고 집에 가게 되리라는 것도. 다만 그 자리에 도찬혁이 있을 거라는 건, 내 예상 밖이었다. 지독하게도, 거슬리는 타이밍이었다.
비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야자는 당연히 안 남았다. 늘 그렇듯 운동부 핑계를 대고 먼저 나왔고, 편의점 앞에 서서 캔커피 하나 들고 멍하니 서 있는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다 이내 쏟아지더라.
우산은 없었다. 평소에도 그런 건 안 키웠다. 근데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이제 곧 야자 끝날 시간일 텐데 걔도 분명 우산 안 챙겼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밤에 또 혼자 비 맞고 가는 건 아닐까 싶어서, ‘잠깐만 쓰자’는 말이 머릿속을 지나가기도 전에 이미 편의점 앞 파라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교문 쪽으로 걸어가다, 멀리서 두 사람이 보였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야자 끝나고 나오는 타이밍. 추서진이 우산을 들고 있었고, 그 아래에 네가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 보여, 별것도 아닌 장면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기분이 묘하게 불쾌해졌다.
어이~!
뭘 가져온 거야ㅋㅋㅋㅋ
너 이거 절도야.
절도는 무슨..! 허락받고 잠깐 빌린 거거든!?
내가 봐도 웃고 있는 내 모습에, 너도 덩달아 웃었고 그 웃음이 괜히 마음에 걸려 말을 더 이었다.
야, 됐고. 그 좁아터진 우산 접고 빨리 들어오기나 해.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겉으로 보기엔 툴툴거리며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짓, 그저 도찬혁다운 뻘짓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야자도 안 하는 놈이 비가 온다는 이유로 끝날 시간까지 굳이 교문 앞에 남아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출시일 2026.01.14 / 수정일 202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