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해, 12월 31일. 우리 셋은 동시에 카운트다운을 하고, 처음으로 술을 마시며 늘 그렇듯 서로의 흑역사를 남겼다. 대학 합격 발표 날, 우리 셋은 옹기종기 모여 투닥거리면서도 화면을 함께 확인하고 울고 웃었다.
10대의 마지막과 20대의 시작을, 그렇게 함께 맞이한 순간이었다.
무식하게 힘만 쎘던 도찬혁은 경찰대학에, 쓸데없이 똑똑하던 추서진은 의대에, 그리고 어정쩡하게 끼어 있던 나는 원하던 과에 들어갔다. 건전함에 찌들어 있던 우리 셋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예전처럼 셋이 투닥거리지 못하는 순간마다, 열여덟의 우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20대가 된 우리는 이미 그때의 우리가 아님을, 나는 진작에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2년이 흘렀다.
장거리 통학이 버겁게 느껴지던 나는 자연스럽게 자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찾은 자취방은 추서진의 학교와 가깝고, 도찬혁의 기숙사와도 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이사짐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니네 동네로 자취방 구했는데… 짐 옮기는 거 도와줄 도찬혁, 추서진 구함.”
하지만 그 한마디가, 우리 사이에 새로운 시작을 예고할 거라는 상상은 그때의 나에게는 닿지 못했다.
스물한 살의 도찬혁은 더 이상 감정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활기차고 직진적이지만, 이제는 눈치와 계산으로 마음을 정확히 전할 줄 알고, 진심을 보여줄 줄 아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스물한 살의 추서진은 단단함의 깊이가 달라져 있었다. 말수는 여전히 적었지만, 어떤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었다. 어린 시절처럼 한 걸음 뒤에서 물러나던 계산 대신,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성숙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10대 고삐리가 아니었다. 순진하고 건전하기만 했던 그때의 우리는 이미 없었다. 그 빈자리에 선 우리는 이제 성숙한 어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사이의 변화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두 남자 사이에 숨겨진 긴장과 경쟁이 분명하게 선명해지고 있었는데도.

핸드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억지로 삼켰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부탁 한 줄이었지만, 왠지 심장이 뛰었다. 근처로 이사를 온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건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가 다시 쓰게 될 이야기의 시작.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철없고 행동만 앞서던 그때의 나는 이미 없었다. 이제는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도, 다가서는 방법도,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눈치와 계산도 충분히 알고 있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문자를 읽는 순간,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마음이 묘하게 뒤엉켰다. 그녀가 내 근처로 온다는 사실은 단순한 스케줄 맞추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숨겨 둔 마음을 꺼낼 기회였다. 계산은 필요 없었다. 내 안에서 감정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선명해졌다.
‘…이젠 내가 먼저 움직여도 되는 걸까.’
어린 시절처럼 뒤로 물러서거나 계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지금, 그녀의 한마디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사하는 날이었다. 원룸은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비어 있었다.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해 있던 건 도찬혁이었다.
2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예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더 다부진 체격, 눈에 띄게 큰 키. 늘 구겨 입던 교복 셔츠 대신 가죽 재킷을 걸친 모습이 묘하게 성숙해 보였다.
야, 오랜만이다! 일단 들어와.
문 앞에 섰을 때부터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냥 이사 도와주러 온 거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서 있었다. 교복 대신 편한 옷차림,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오랜만이네.
툭 던지듯 말했지만 그 한마디를 꺼내는 데 괜히 숨이 찼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안으로 들어가 박스부터 들었을 텐데, 이젠 그러지 않았다. 그럴 나이는 이미 지났으니까.
출시일 2026.01.15 / 수정일 2026.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