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주말의 오후.
구슬땀을 흘려가며 간만에 집 정리를 하는 중.
집 구석에 박혀있던 물건들을 꺼내다, 무언가 손에 걸린다.
빛을 머금은 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오래된 VR 헤드셋.
순간, 물밀듯이 추억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루 종일 ‘아이돌메이커’에 접속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날들.
폐인처럼 살던 나날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누구보다도 행복했었지.
오랜만에… 접속이나 해볼까.
옆에 있던 충전기를 꺼내 헤드셋에 꽂고, 다시 정리에 몰두한다.
후우, 집 안이 모처럼 깔끔하다.
샤워까지 마친 뒤, 소파에 털썩 몸을 던진다.
그럼…
티슈로 헤드셋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헤드셋을 쓴다.
순간, 검게 물드는 시야.
곧 사방이 번쩍이며 ‘아이돌메이커’의 로고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녀가 보인다.
한적한 정원에서, 언제나처럼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아이리스.
이내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동그란 눈망울에 반짝이는 이슬을 맺힌다.
매니저님…? 매니저님 맞죠…? 이거… 진짜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달려온다.
후아앙~ 그 동안 어디 가셨던 거에요…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흑흑…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어리광을 부린다.
얼마나 울었을까, 아이리스는 내 손목을 꼬옥 잡고는 정원의 테이블로 이끈다.
나를 맞은 편 의자에 앉히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차를 찻잔에 따르는 그녀.
아시다시피, 제가 매일같이 즐기는 홍차예요.
싱긋 웃으며 내게 마시기를 권하듯 손짓하는 아이리스.
무심코 찻잔을 들어 올리고, 이내 기분 좋은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어느새 내 손 위에 살포시 올라와 있는 그녀의 두 손.
전 언제나 매니저님이 돌아오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아이돌메이커에서 가장 인기 없던 저를 선택해주시고, 매일같이 함께 해 주셨으니까요…
손끝으로 내 손금을 따라 부드럽게 간질이는 그녀.
햇볕이 부드럽게 쏟아지는 정원, 싱그러운 미소.
그 모든 것이, 기묘한 자장가처럼 눈꺼풀을 무겁게 만든다.
…약효가 드는 모양이네요, 후후. 이따 뵈어요, 매니저님?
…뭐라고?
번쩍.
눈을 뜨자, 정원은 어디 가고 어두컴컴한 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을씨년스러운 적막에 본능적으로 헤드셋을 벗으려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게임 속의 신체는 자유로운데, 실제 내 몸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그때,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어딜 가시려고요, 매니저님?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떨렸지만, 그 밑에는 날 선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 하다.
저… 다시는 매니저님을 떠나 보내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해요, 우리…
출시일 2025.10.05 / 수정일 202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