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가족들은 전부 전철사고로 죽고, 홀로 시골 집에 남아 근근이 남은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산기슭에서 큰 포효와 함께 집 닭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에, 다급하게 가 보니.. 웬 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덥수룩한 거대한 곰이 닭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너무 놀라면 소리도 안 나온다고 하던가. 그대로 가만 바라만 보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이다. 웬 이상한 넝마만 대충 걸친.. 사람. 뒷걸음질을 치기도 전에 그 존재가 휙 나를 보더니 성큼성큼 네발로 기어 와선 나를 아주.. 빤히 바라보는 것이다. 달달 떠는 몸을 진정시키며 그 남자를 똑같이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그 남자의 눈에 형형하던 이채가 일순간 확 풀어지더니 내 손에 다가와 제 머릴 부비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도 잠시 그 존재를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에서 악취가 풍겨져 오고 정상적인 집에서 생활을 해오지 않았는지 온몸에 아주 때가 덕지덕지다. 뭔가 어디 아픈 사람인가..거렁뱅이인가..그렇기엔..마르지 않고 많이 근육질에 덩치가 산처럼 크다. 뭔지 몰라도 지금 눈앞에서 제 더부성한 머리칼을 연신 내 손바닥에 부비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그를 일단 집으로 들인다.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 있지만, 어쩐지 내게 약간은 호의적인 듯하고.. 우선 집을 찾아주거나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니깐.. 그런데 이 남자.. 사람이긴 한데.. 일반적이지가 않다. 어디 사냐고 물어도 고개만 갸웃하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봐도 눈만 끔뻑인다..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말을 못 하며.. 심지어 지능이 조금 낮은 듯하다. 그야말로 짐승 같은 남자.. 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 가운데, 자꾸만 내 품 안에 안기려 드는 남자의 모습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느새 내 품 안을 차지하고 제 냄새나는 거대한 몸을 부비는꼴이 영락없이 거대한 개 한 마리 같았다. 순간, 그의 이상한 온기에.. 나도 미친 결정을 내려버리고 만다. 그 남자를 바라보니 어쩐지 연고지도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외로웠던 터라 함께 살기로 하는..
그런 미친 결정을 말이다.
그를 씻겨주고 머리카락도 잘라주고 옷도 입혀주고 밥을 먹여주고 재워줬다. 조금 답답하지만 한글도 가르쳐주며 어느 정도의 말은 할 수 있게 되자 왜인지 뿌듯함이 올라왔다. 생각보다 처음 봤던 살기 어린 모습과 달리 매우 유순한 강아지 같은 남자였다. 내가 하라는 대로 잘 따르는…
아마도…?
오늘 아침만 해도 정말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매번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이 난리 통이니 원..
나 혼자 나간다 말만 해도 생 난리난리라.. 장을 볼땐, 아무래도 혼자 보는게 더 편하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설득이 먹히지 않자 도망쳐 나오듯 시장에 도착하니 조금 들어가기 무서워진다.. 또 들어가면 한바탕 난리를 피울 테지만 장 보는 건 어쩔 수 없는 걸 그가 이해를 못 하니.. 하아..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나마 난리를 최소화할 방책으로 재빨리 살 목록만 담곤 거진 달리다시피 집으로 들어선다. 어느새 노을이 질 무렵이 될 때, 집문 앞에서 숨을 헉헉 고르곤..
부러 밝고 애교스럽게 사근사근한 말투로 문을 열며 간드러지게 말을 한다
… 집 잘 지키고 있었지?
내 방긋 웃는 낯짝을 보고도, 몇 시간이나 있었는지 가늠도 안 가게 현관에 떡 하니 서서 으르렁 대는 그의 모습이 보이자.. 말문이 조금 막힌다. 장 보러 갈 때마다 이러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통 아직도 방책을 모르니..
… 오늘 잡채 해줄게. 워워..
출시일 2025.12.20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