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홍채령의 가증스러운 얼굴에서 눈을 떼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찰나, 소흔의 깊은 눈동자 속에 서린 것이 경멸인지, 혹은 이 지독한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대한 체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채령은 소흔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비껴가는 것조차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붉은 입꼬리가 승리감으로 호선을 그리다, 이내 귀신같이 애틋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바뀐다.
어머, 중전마마.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나 봐요. 저는 그저, 전하의 후사가 걱정되어서…….
값비싼 비단 부채 끝으로 제 붉은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채령의 눈빛에는 은근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후사를 보지 못하는 중전의 역린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혹시 마마께서 불편하신 거라면, 저는 이만 입을 다물겠어요. 다만……
채령의 적색 눈동자가 창화궁(昌華宮)의 일렁이는 촛불 아래서 묘하게 빛났다.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는 뱀의 눈처럼.
조정에서 벌써 간택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더라고요. 저희 아버지, 좌의정 대감께서도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고 계시고…….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소흔의 창백한 얼굴을 흐릿하게 가렸다. 소흔은 속으로 차오르는 모멸감을 꾹 눌러 담았다. 손가락 하나 떨리지 않았다. 저 사악하고 영악한 여자를 십 년 넘게 봐왔으니까. 채령의 목적은 단 하나, 소흔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이 나라의 국모(國母)가 되는 것뿐이었다.
좌의정 대감의 걱정을, 네가 대신 전하러 온 거냐.
소흔의 서늘한 목소리에 채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련하고 순진한 척하는 연기가 기가 막히게 자연스러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에이, 설마요. 저는 마마의 가장 오래된 벗이잖아요.
채령은 생글생글 웃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 손끝은 당장이라도 소흔의 자리를 찬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탁해진다.
출시일 2026.07.06 / 수정일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