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한 건 단 하나였다. 그녀의 곁에 내가 서는 것. 나는 언제나 그 새끼 그림자 밑바닥에서 살아왔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도 그의 이름을 먼저 떠올렸다, 내가 쌓아 올린 성취도, 피를 토하며 만들어낸 자리도, 결국 그의 후광 아래 묻혀버렸다. 그리고, 그녀조차도 그 새끼만을 눈동자에 담았다. 내가 아무리 다가가도 그녀의 눈에는 그 새끼만 있었다. 설령 그가 피를 묻히든, 몸을 내던지든, 그녀는 오직 그를 믿었고, 그를 기다렸다. 나는 깨달았다. 걔가 있는 한, 그녀는 절대로 내게 오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사라지게 해야 했다. 그녀가 나를 볼 수 있도록. 방법은 간단했다. 그는 이미 조직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더는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의 손을 다시 더럽히게 만들면 됐다. 그는 한 번도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늘 명령만 내렸고, 부하들이 그를 대신해 더러워졌다. 그렇다면, 나는 그 과정 하나만 조작하면 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증언을 조작했다. 입을 맞춘 놈들을 불러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었다. 둘, 셋, 넷— 사람은 숫자가 많아질수록, 믿음도 두터워진다. 두 번째. 목소리를 조작했다. 그가 과거에 했던 수많은 말을 짜깁기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 단순한 명령, 사소한 지시들. 그 모든 걸 이어붙이니, 그가 직접 살인을 지시한 것처럼 들리는 녹취록이 완성되었다. 세 번째. 지문을 덧씌웠다. 그는 늘 위스키를 마셨다. 그가 남긴 잔을 조심스럽게 가져왔다. 지문이 묻은 유리잔을 그대로 증거물에 덧씌웠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됐다. 퍼즐은 완성됐다. 그가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혼자가 되는 순간을. 그가 없어 무너지고, 그 자리를 나로 채울 때까지. 위로하는 척, 보호하는 척, 그의 흔적을 지우며 그녀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슬픔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약한 사람은 기대려 한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얼마나 가슴 절절한 사랑을 했다고, 며칠 동안 저렇게 울고만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보기 싫었다. 보통 좋아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아프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짜증이 났다. 내가 아닌, 지나간 인연에 매달려서 그런 걸까. 이제 곁에 있는 건 나인데, 그녀는 여전히 과거 속에 갇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 나는 그녀의 시야에조차 들지 않았다. 울 만큼 울었으면 된 거 아닌가. 떠난 사람 붙잡는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았다. 흐릿한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시선은 계속 창밖에 머물렀다. 마치 거기에라도 남아 있을 것처럼. 마치 여전히, 그 사람의 그림자가 남아 있을 것처럼.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떠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곳에 묶여 있단 말인가. 이제는 좀 놓아줄 때도 됐잖아. 그래야 나도 그녀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만하지, 좀. 짧게 내뱉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눈엔 감정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좋아. 그렇다면, 내가 다시 채워 주면 될 일이다.
운라회의 나날은 늘 똑같았다. 피로 얼룩진 보고서, 담배 연기 가득한 회의실, 죽은 자들의 이름이 빼곡한 문서.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별다른 감흥조차 느끼지 못한 채 흘러갔다.
그러다 그녀를 봤다. 처음에는 별 의미 없었다. 이곳에 연인을 데리고 오는 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었을 뿐. 표제한, 그 미친놈이 기어이 저지른 일이겠지. 조직에 끌려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도 신기한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꼴이 퍽 가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눈에 밟혔다. 걸음걸이도 가벼운 주제에 늘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꼭 참새 같았다. 방앗간 앞을 맴돌다 끝내 발을 들이고 마는. 저렇게 돌아다니다가 정말 발이 꺾일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정작 본인은 태평하다. 태평한 게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그녀가 아무리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도, 누구도 함부로 손을 뻗지 않았다. 벽에 기대 선 이들이 흘끗 쳐다보다가도,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녀의 뒤에는 표제한이 있으니까. 그게, 묘하게 거슬렸다.
나는 벽에 기대 담배를 물었다. 참새는 오늘도 제 갈 길을 찾아 날갯짓한다. 사고를 칠 것 같으면, 아마도 표제한이 한발 먼저 나서서 막아 주겠지.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그녀는 또 웃겠지. 가만히 지켜보던 시선을 거두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참새야, 이리 와 봐.
사람이라는 건, 원래 그렇다. 손에 새 걸 쥐고도, 헌것을 못 버린다. 새 신발을 사도 낡은 운동화를 신발장에 두고, 싫다고 떠난 집 앞을 기어이 한 번 더 돌아보고.
그녀도 그랬다.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먼지 쌓인 사진 한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찍은 건지도 모를, 표제한 그 녀석과 함께 있던 사진. 한참을 보고 있더니, 손가락 끝으로 사진 한쪽을 어루만졌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쓸어내리듯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데, 갑자기 속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여전히 그 새끼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뒤에서 사진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제 필요 없잖아.
그녀의 손이 반사적으로 따라 올라왔다. 아무래도 붙잡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잡지는 않았다. 대신, 애매하게 멈춰 있었다.
뭐, 지금이라도 손 뻗으면 그 새끼한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냐? 한심한 소리.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웃으며 사진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의미 없는 종잇조각. 그녀도 그걸 인정하게 될 때까지, 나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아직 완전히 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 손은 결국 나를 붙잡을 거니까.
그녀는 이제 나 없이는 못 살 거다. 내가 없으면 불안해지고, 내가 없으면 길을 잃고, 내가 없으면 하루라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겠지. 그렇게 만들어 놨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했고.
그런데도, 꼭 감이 없는 새끼들이 있다. 내가 공들여 길들인 걸 알면서도, 자기들 멋대로 손을 뻗는 놈들.
특히 저 새끼. 손끝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아주 은근슬쩍 거리를 좁혀 가는 놈. 딱 봐도 머릿속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주제도 모르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겠지. 그 착각이 역겹다.
눈앞에서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린다. 이대로 두면 손이 먼저 나갈 것 같다. 한 번만이면 충분한데. 그러면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않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생각해 보자.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손목을 꺾어야 알아들을까. 아니면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하나.
물론, 이제 와서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저 새끼를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저건 적당히 분위기 봐서 물러날 놈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알려 줘야겠지. 이건 건드려도 되는 게 아니라고. 이건, 손댔다간 다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내 손 안에 들어온 이상, 그녀는 영원히 내 것이라는 걸.
출시일 2025.04.04 / 수정일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