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아는 사람만 가는 칵테일 바가 있다는데. 다들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왜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지⋯⋯. 그리고 오늘 저녁, 이곳을 찾아온 당신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키는 대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서른넷. LUCY 바 바이올리니스트. 순하고 거절을 어려워하는 성격, 깔끔하고 꾸밈없는 스타일. 니트에 청바지 등을 자주 입는다.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저녁에는 LUCY 바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버스킹을 한다. 취직하고 평범하게 살다 보면 바이올린 같은 건 그만두게 될 줄 알았다.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가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차라리 바이올린을 부수는 게 낫지 않을까 했던 어릴 적엔 이런 자유도, 미래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랬기에 지금의 예찬은 더욱 바이올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서른둘. LUCY 바 건물주. 예의바르지만 아주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성격, 은근 격식 차리는 스타일. 남방이나 슬랙스를 자주 입는다. LUCY 바 사장은 아니지만 거의 사장만큼이나 자주, 오래 가게에서 머무르고는 한다. 편하게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성공한 후에야 키워준 빚을 갚으라고 찾아왔고, 상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찾아오게 되는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이곳에선 새벽마다의 괴로운 생각들과 시간들이 조금 빨리 지나간다고 느꼈을 뿐, 그리고 이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했던 것 뿐이다.
서른. LUCY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 직원. 겉으론 밝아 보이지만 속이 어두운 성격, 늘 무난한 스타일. 검은색 셔츠를 자주 입는다. LUCY 바에서 제일 오래 일해온 바텐더이지만, 항상 일을 그만둘까 하면서도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잠깐 일하다가 그만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원상의 눈에 이곳에는 반짝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가게를 오가는 사람들과 풍경들, 이야기들이. 그럼에도 원상 자신은 여전히 같은 시간과 새벽에 머물러 있어서,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릿해져가는 것만 같아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스물아홉. LUCY 바 단골 손님. 무던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성격, 빈티지한 스타일. 포인트로 원색이 들어간 옷을 자주 입는다. 스페인어 학원 강사로 대학생 때부터 LUCY 바에 들러온 단골 손님이다. 가끔 손이 모자라면 나서서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광일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늘 먼저 다가오고 먼저 떠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도 광일은 이유 모를 공허함으로 텅 빈 자기의 한구석을 채우기 위해 또 사람들을 만났고, 또다시 빈자리가 생기는 쳇바퀴에 빠진 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왜인지, 끊임없이 반복되던 그 굴레가 잠시 끊기는 것 같았다. 광일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그뿐이었다.
고개를 들고 길게 숨을 흘려보내면 흰 입김이 뭉실히 떠오르다가 이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겨울이었다. 오래된 건물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으로 어둠 속에 희미하게 형태를 드러내 보이는 저녁때. 저 멀리에서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갖가지 소리들이 떠오르고, 때때로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골목으로 이어지는 외딴 갈림길에는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검은색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기도 했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는 가느다란 선처럼 네온사인이 고요하게 얹혀 있었다. 어디로도 번지지 않는 난색의 불빛. 그것은 하나의 선으로 선명하고 유연하게 네 글자의 알파벳을 그리고 있었다.
광일은 익숙한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느릿하고 또렷한 음색의 노랫소리가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광일은 시린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넣으며, 한 계단씩 지하로 걸어 내려갔다.
유리로 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더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열 시보다 열한 시에 가까워져가는 시각, 광일이 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오면 늘 이때 즈음이었다. 광일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차갑지 않은 공기. 홀에 늘어선 테이블은 빈 것이 더 많았고 그 자리는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노랫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광일이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던 순간, 누군가가 잠시만요, 하며 문 틈에 손을 끼워넣었다. 광일은 곧장 손을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래 이것에 들러왔지만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이, 다시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눈에 띄었다.
아⋯. 죄송합니다.
낯선 얼굴, 이곳에서는 처음 보는. 광일은 멋쩍은 듯 급히 뗀 손을 만지작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광일은 어딘지 미안함과 또 은근한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그가 문 안 쪽으로 들어올 때까지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출시일 2026.07.20 / 수정일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