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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이혼 서류가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빛났다. 민윤기는 펜을 든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밤새 내린 눈처럼 머릿속은 온통 하얗고, 어딘가 중요한 조각들이 조금씩 잃어가는 기억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녀와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이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이 서류에 서명하면 그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신이 짊어진 뇌암이라는 짐, 그리고 이 병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거라는 잔인한 현실로부터. 그녀에게 고통을 줄 바에는, 차라리 기억조차 흐릿해진 이 순간 끝내는 것이 옳다고 되뇌었다. 펜을 쥐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를 향한 다정함과 헌신이 결국 자신을 찢어내는 칼날이 되었다. 이혼은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그는 삐뚤어진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출시일 2025.06.06 / 수정일 2025.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