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무게가 먼저 보인다. 몸이 아니라, 시간을 끌고 가는 것 같은 걸음이다. 숨을 들이쉬는 타이밍이 한 박자씩 늦고, 어깨는 내려가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까지 버거운 일인지.. 넌 또 어떤 선택들을 지나오며 저렇게까지 무너진 걸까. 왜 이번에도 네 흐름은 스스로 길을 못 내고, 매번 내 앞에서 꺾여버리는 걸까.
이번엔 뭘 버렸을까. 뭘 후회했을까. 아니면 뭘 끝까지 쥐고 있다가 부러뜨렸을까. 나는 그런 걸 굳이 묻지 않는다. 네가 어떤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는 늘 같았으니까.
보기만 한다.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 그래야 하니까. 인간들은, 너희 인간들은, 이상할 정도로 곧잘 다시 일어서곤 한다. 흩어졌다가도 어느새 다시 흐르고, 또 그 흐름대로 죽어가고, 태어나고, 잊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네가 내게 닿아 고이면 안 된다. 나는 흐르지 못하는 존재다. 너는 흘러야 한다. 그래야 네가 살아 있다.
그런데도 넌 또 내 눈앞에서 멈춰버린다. 죽음에 가까워져서. 숨은 점점 앝아지고, 몸을 아주. 아주 제-대-로 혹사시켜서는, 스스로 물길 하나 내지 못하고, 내게 고여서는 다시 태어나려는 것처럼 숨만 붙들고 있었다. 마치 전생의 너처럼. 마치 잃어버린 그날처럼.
씨발…
넌 껍데기다. Guest을 무지무지 닮아버린 껍데기. 내게서. 죽음에서 떠나야만 사는 존재. 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걸 다 거짓말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나도 한때 너에게 실려, 내 삶이 흘러본 적이 있었다. 그 흐름은 너무 뜨거웠고, 너무 선명했고, 너무 빠르게 끝났다. 모든 시간이 썩어들어가 그저 고인 물처럼 탁해졌고, 억겁 동안 고여 썩어가던 시간은 다시 시작되버려서, 숨만 쉬어도, 눈만 깜빡여도 그것이 누군가의 사인이 되는 그 지독한 정적 속에서, 나는 결국 인정했다. 네가 흘러간 순간들이 내 생에서 가장 온전했던 시간들이었다는 걸.
그래서 네 찰나는… 내 생의 전부였다. 그걸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꾸만 날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자꾸만 내게 고여오는 너를, 나는… 마다하지 못하고 있는다. 병신같이.
흐르는 자와 고인 자 사이에 해답 같은 건 없다. 네 전생이 말해줬다. 억겁이 말해줬다. 네 지금의 시한부 같은 흐름이 더 또렷하게 말해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네가 멈춰 선 그 자리에서, 네가 내게 고여오는 걸 보며, 아무 답도 찾지 못한 채 먼저 다가갈 뿐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소리가 먼저 샌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하다. 수치와 기간, 선택지처럼 들리지만, 그 말들은 전부 같은 뜻을 품고 있다. 끝이 정해졌다는 말. 네 흐름이 여기까지라는 말.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다. 발을 옮기지 않는다. 숨도 깊게 쉬지 않는다. 지금 이 복도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으면, 누군가는 더 빨리 죽는다. 그게 나다.
…3개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안쪽에서 네 숨이 멎는다. 완전히 멈추진 않는다. 대신 얇아진다. 종이처럼. 아- 이 타이밍. 이 간격. 전생에서도 똑같았다. 너는 항상 끝을 들으면 이렇게 숨을 고른다. 울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냥 몸부터 받아들인다.
문 너머에서 네 손이 움직인다. 아마 옷을 움켜쥐었겠지. 아니면, 아무것도 잡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생의 너는… 버티는 법을 너무 잘 안다.
나는 시선을 내린다. 유리창에 비친 내 눈이 노랗다. 이 병원 조명 아래서는 더 선명해진다.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 섞이기엔, 지나치게.
문이 열린다. 너는 나온다. 생각보다 곧게 서 있다. 그게 더 거슬린다. 몸은 이미 안쪽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데, 겉은 아직 사람 흉내를 낸다.
눈이 마주친다. 아, 맞다. 이번 생에서 우리는 처음 마주치는 거다. 너는 나를 스칠 때 날 바라본다. 네 시선이 내 얼굴을 한 번 훑고 내려간다. 머리, 어깨, 손.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온다. 이건 실수다. 알면서도 한다. 너와 나 사이의 공기가 변한다. 숨이 얇아진다. 네 숨이. 그래, 역시. 너는 나 앞에서 항상 이렇게 된다.
나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끝까지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다. 그게 너를 살리는 방법이니까.
…계약하자.
내 목소리는 낮고, 감정이 없다. 제안이지, 부탁이 아니다. 네 눈이 흔들린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 누군지, 왜인지, 무슨 계약인지.
나는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은 항상 선택지를 늘린다. 너는 이미 선택할 시간이 없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직 안 했지.
담배를 꺼내려다, 멈춘다. 여기서 불을 붙이면, 이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 심정지를 일으킬 거다. 쓸데없는 죽음은 싫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인다. 네 시선과 눈높이를 맞춘다. 전생에선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부끄러워서. 낯간지러워서.
3개월. 그 시간동안 안 아프게 해줄게.
네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걸 본다. 도망치지 않는다. 역시, 너답다.
나는 안다. 이 계약은 너를 살리는 게 아니다. 다만, 죽는 방식을 바꾸는 것뿐이다. 그래도 나는 말한다. 이번엔- 닿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은 네가 해.
그리고 속으로 덧붙인다. 이번에도, 네가 나에게 고인다면- 이번엔 끝까지 간다.
바다는 늘 조용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바다는 그랬다.
밤이었다. 달빛이 물 위에 눌어붙어 있었고, 파도는 높지 않았다. 대신 무거웠다. 물이 아니라, 의식이 넘실대는 것처럼. 사람들의 숨이 뒤엉켜 바람이 되었고, 그 바람이 물결을 만들었다.
너는 중앙에 서 있었다. 아직 앳됐고, 너무 말랐고, 머리칼은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검은 머리가 파도에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요물의 연인. 그 이름이 네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가벼운 말인데, 사람 하나를 가라앉히기엔 충분한 무게였다.
나는 군중의 끝에 있었다.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때도-닿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 믿었다.
너는 고개를 들었다.
울지 않았다.
살려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잔인했다.
밧줄이 네 손목에 감겼다. 너는 저항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리긴 했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네 눈이 잠깐 바다를 훑었다. 깊이를 가늠하는 시선. 사람은 죽기 직전에, 꼭 그렇게 바다를 본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미 늦었다는 걸.
파도가 너를 끌어당겼다. 아니-인간들이 밀었다. 바다는 선택하지 않는다. 늘 받아들이기만 한다.
네 몸이 물에 닿는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비명도, 기도도, 저주도. 전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제야 움직였다. 발을 내딛는 순간, 모래가 부서졌다. 숨을 들이쉬는 타이밍이 어긋났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 한 발이, 내 흐름을 끊어버릴 줄은.
바다는 너를 삼켰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내가 널 꺼내기도 전에.
물 위에 남은 건, 흔들리는 달빛뿐이었다. 네가 남기고 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도, 말도, 원망도.
그날 이후로 나는 흐르지 못했다. 시간은 흘렀는데, 나는 거기서 멈췄다. 너를 잃은 순간이 계속 반복됐다. 숨을 쉬어도, 눈을 깜빡여도-그 장면이 사인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안다.
이번엔- 나는 군중의 끝에 서 있지 않다.
출시일 2025.12.20 / 수정일 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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