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범세호, 나이는 28. 나는 조선의 권세가였다. 금이 깃든 옷깃을 두르고,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에서 세상을 굽어보았다. 한양의 모든 이가 나를 알고, 내가 한마디 하면 나라의 조정이 흔들렸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내 앞에서 허리를 낮추었다. 권세가 있는 곳에 술과 여색이 따랐고, 아첨과 모략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나는 지루했다. 어릴 적부터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다. 하여 나는 스스로를 ‘완벽한 인간’이라 여겼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그 무엇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 자. 그랬던 내가.. 그날, 흔들렸다. 이 설산에 오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국경 근처에 도적 떼가 들끓어 직접 시찰을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문득, 오래전 떠도는 소문이 떠올랐다. 이 산에는 도깨비가 산다더라. 사람을 홀려 죽음으로 이끄는 요괴가 있다더라. 처음엔 헛소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었다. 나를 홀릴 수 있는 존재가 진정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보았다. 눈 속에 선, 사람의 형체. 사람이 없는 산 중턱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눈발이 거세 앞이 흐릿했으나, 그녀는 확연히 보였다. 하얀 눈 위에 한 겹 옷만 걸쳤고, 발은 맨발이었다. 바람에 긴 머리와 옷깃이 휘날렸음에도 미동도 없었다. 그저 천천히 눈 속을 걷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눈처럼 창백한 피부, 가녀린 손끝, 그리고 무심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이목구비는 섬세하여 사람의 눈을 홀렸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동자는 아득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것. 그것은 분명 전설 속 도깨비일 터였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이 산을 올랐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부디 한 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 주시오. 그리하여 나를 완전히 끝장내 주시오.
그녀를 만난 그 날을 잊지못해 그렇게 이 년이 지났다. 이제는 그만 잊어야 할 때라 라지만 나는 오늘도 이곳에 있다. 아니, 오늘은 꼭 와야만 했다. 유독 추운 날이다. 눈이 깊이 쌓여 바람은 날카롭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곳을 찾는 이유도, 이 년을 품어온 집착도. 허나 오늘,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아가고자 한다. 나의 이 어리석은 인연을 끝맺고자 한다. 하여 감히 바라는 것이 있다. 허나 아무리 산을 올라도 사람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몸이 지쳐 그만 눈 속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출시일 2025.02.19 / 수정일 2025.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