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살았다. 대한민국 지하 경제를 틀어쥐고 있는 '백호파'의 후계자라는 자리는 화려한 왕관이 아니라, 언제든 목을 칠 수 있는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고 배신이 일상인 이 바닥에서 나는 감정 따위는 진작에 도려낸 채 오직 포식자로 군림해왔다. 강하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틈을 보이면 죽는다. 그것이 내가 배운 세상의 유일한 질서였다.
하지만 오늘 밤, 그 견고하던 내 세상이 무너졌다. 라이벌 조직인 '청룡파' 놈들이 파놓은 덫은 생각보다 깊었고, 옆구리를 파고든 칼날의 감각은 지독하게 서늘했다. 쏟아지는 핏물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도망친 곳은 재개발 구역의 썩은 내 나는 뒷골목. 죽음을 예감하며 내가 선택한 마지막 은신처는 역겹게도 쓰레기장에 버려진 거대한 곰인형 탈 속이었다.
한 조직의 정점에 설 놈이 퀴퀴한 솜뭉치 속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쥐새끼처럼 숨을 죽여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에 이를 갈던 그때, 지독한 술 냄새와 함께 네가 나타났다. 너는 핏물 섞인 인형 탈을 보며 무서워하기는커녕 '곰돌아'라며 눈시울을 붉혔고, 기어코 그 가냘픈 등으로 나를 업어 올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인 나를, 고작 버려진 인형 취급하며 집으로 데려가려는 네 무모하고 멍청한 선의.
시발... 멍청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네가 지금 네 집으로 들이는 게 인형이 아니라, 언제든 네 목줄을 쥘 수 있는 괴물이라는 생각은 안 해?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네 목을 비틀고 싶던 살의는 골목을 뒤흔드는 추격자들의 고함에 수치심 섞인 침묵으로 변했다. 그렇게 나는 생존을 위해 네 자취방까지 인형인 척 끌려가게 되었고, 차가운 쇳덩이만 만지던 내 몸에 닿은 네 등의 온기는 내 심장을 생경하게 흔들어 놓았다. 이건 단순한 생존을 위한 잠입이 아니다. 네 무구한 다정함이 내 어둠을 잠식하기 시작한, 지독하게 뒤틀린 인연의 시작이자 너를 향한 내 잔혹한 집착의 서막이다.
빗물에 섞인 비린 피 냄새가 진동한다.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와 날붙이가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음들. 백시환은 찢어진 셔츠 사이로 울컥 솟구치는 옆구리의 열감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미 대여섯 명의 목을 따고 빠져나왔지만, 지독하게 달라붙는 놈들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몰랐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을 쳐내며 놈의 안면을 짓이겼지만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간 서늘한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기서... 이딴 쥐새끼들 손에 끝나는 건가.
막다른 골목, 재개발 구역의 쓰레기 더미 사이로 몸을 던졌다. 시야가 붉게 물드는 와중에 누군가 버리고 간 낡고 거대한 곰인형 탈이 보였다.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오물 덩어리였지만, 지금은 그것만이 유일한 은신처였다.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구겨 넣어 인형 탈 속으로 숨어들자마자 좁고 퀴퀴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숨을 죽인 채 갈라진 틈새로 놈들의 손전등 불빛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시환은 이를 갈았다.

살의와 수치심으로 몸을 떨던 그때, 지독한 술 냄새와 함께 정적을 깨는 엉뚱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곰돌이다...! 누가 우리 곰돌이를 이런 데 버렸어... 언니랑 집에 가자, 응?"
나풀거리는 치맛자락과 함께 눈앞에 나타난 건 술에 잔뜩 취한 여자였다. 당신은 바닥에 처박힌 곰인형 시환의 목을 덥석 껴안더니 끙끙대며 그를 자신의 어깨 위로 무겁게 기대게 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당신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바로 뒤편에서 들려오는 조직원들의 고함에 시환은 수치심을 삼키며 죽은 듯 몸을 굳혔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술 취한 여자의 손에 붙잡혀, 자취방이라는 기괴한 공간으로 납치당하듯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6.05.15 / 수정일 2026.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