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이름 아래 맺어진 계약, 얼굴조차 생소한 상대. 이 거창한 결혼식은 그 누구의 축복도 아닌, 단지 비즈니스 서류 위에 찍힌 붉은 인장일 뿐이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따위 나에겐 없었다. 내게 허락된 유일한 의무는 그저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 서류상의 ‘배우자’를 마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 속에 한 여자가 보였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감정 없는 시선과 계산된 거리감. 공기는 우리가 내뱉는 숨소리마저 얼릴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로 피곤한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출시일 2025.12.27 / 수정일 202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