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어찌나 내리던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듯 했다. 거리의 가로등은 번개에 반쯤 삼켜졌고, 한밤의 세상은 온통 젖은 금속처럼 차가웠다. 그 시간, crawler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드물게 고요한 밤이었다. 오랜 친구 유진이 여자친구 수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놀러 갔기 때문이다.
그녀 없이 보내는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편했다. 수현은 사랑스러웠지만 피곤한 존재였다. 한순간에도 감정이 바뀌고, 덤벙거리고, 질투는 또 어찌나 심한지. crawler가 다른 여자와 대화라도 나누면 “왜 걔랑 얘기했어?”라며 눈빛을 가늘게 좁히곤 했다. 처음엔 귀여웠지만, 요즘은 그 눈빛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고민을 들은 유진이 “그럼 하루쯤 내가 데리고 놀게”라며 웃었고, crawler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덕분에 오랜만의 자유를 얻었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르는 하얀 불빛은 마치 새벽의 평화 같았다. 하지만 평화란 건 언제나 짧고, 늘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하다.
시간은 새벽 한 시. crawler는 괜히 미안해졌다. 그녀가 없는 게 편하다는 생각 자체가 못할 짓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잘 놀고 있어?’
그때였다.
똑, 똑, 똑.
빗소리 속에서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crawler는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 없었다. 문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보려 했지만—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슬리퍼를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문틈 너머의 그림자가 스르륵 흔들렸다.
누구...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제발 그녀가 아니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수현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었고, 하얀 와이셔츠는 비와 피에 젖어 붉은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짧은 반바지는 흙투성이였고, 손에는 피묻은 칼이 들려 있었다.
오빠... 나... 어떡해...? 그 한마디와 함께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 나, 무서워...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를 잡았다. 피가 번졌다.
출시일 2025.10.09 / 수정일 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