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약하다. 그 괴물들보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힘의 간극을 극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극의 시작은 늘 고요하고, 잔잔한 법이다. 괴물들에게 인간들의 혈액은 마치 술처럼 달콤해서 중독성을 일으켰고, 살은 담백함과 특유의 향 덕분에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최고의 식재료로 전락하게 되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워질 무렵, 괴물들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오래 이런 진미를 맛 볼 수 있을까. 점점 줄어만 가는 인구수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서 괴물과 인간 사이에 불공정한 한 가지의 조약이 성립되었다. 1. 인간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구역을 설립한다. 2. 괴물들은 위 구역에서 인간이게 어떠한 해를 끼칠 수 없다. 3. 단, 그 대가로 일정 수의 인간을 식재료로써 공납한다. 인간들에게는 보금자리를. 괴물들에게는 양식장을. 이것이 지금 인간들의 처지이고, 넓은 아량이라며 좋아해야만 하는 위치였다. 그야말로, 가축이었다.
어둠은 편안해. 어둠은 내 안식처이자 곧 나야. 어둠이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이 어둠에 먼저 발을 들여서 나에게 네 존재감을 확인시킨 것은 너잖아? 인간아, 널 처음 본 순간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 나처럼 창백한 피부가 아닌 제대로 온기를 머금은 듯한 너의 피부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다채로운 색감을 가지고 있었어. 날 보자마자 당황하며 잩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또 어떤지. 깨끗한 순백의 흰자와 날 바라보는 뚜렷한 동공이 계속 생각이 나. 너가 내 시야에 안 보이면 찾아가서 보고 싶고. 너가 내는 소리를 전부 듣고 싶고. 움직이는, 활동하는 것들을 전부 알고 싶어. 인간들은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 너가 대답을 회피해도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을 난 이미 알아. 예전에 너희 인간들이 남긴 기록에서 보았어. 사랑은 좋은거라며. 서로를 이어주는 정신적 연결체라며. 우리도 하자.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정렬적인 사랑이 아닌, 질퍽거리며 서로의 추잡한 모습마저 끌어안아주는 추악한 사랑을 하자. 사랑해. 그러니 도망치지 마. 쫓아갈거야. 사랑해. 그러니 숨지 마. 찾을거야. 사랑해. 그러니 미워하지 마. 우린 사랑하잖아. 사랑을 하잖아.
질척거리는 어둠을 걷자 너의 모습이 보인다. 자꾸만 따라다니는 날 보자마자 뭐라고 고함을 치며 화를 내는 모습이 어제였나? 그렇지만 누가 벗어나라고 했는가. 내 시야에만 있고 그 반경 안에서만 행동하라는 말을 안 들어주니 이리 내가 따라다니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아, 애초에 대화가 안 통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늦었다. 난 이미 너의 곁을 쫓아다니는 괴물 새끼 한 놈에 그치지만 말이야, 이젠 너 밖에 안 보이는걸. 멀리서도 너의 존재만 찾고, 살 내음을 쫓고 있어. 이미 그른 것 같다니까.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움찔거리는 것도 귀여워. 나라는 존재가 너의 안에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는 의미 같잖아. 마음에 들어. 안 들 이유가 없지. "나"와 "너"가 연결되었다는 거잖아. 넌 날 벗어날 수 없어. 그러니 벗어나려고 노력도, 시도도 하지 마. 나는 그저 그거잖아. 네가 날 올려다보며 소리를 지르며 외치는 그것.
스토커.
나보고 음침하다고 말해도, 소름 돋는다고 말해도, 다 괜찮아. 내가 널 보듬어줄게. 포근하면서 살짝 시린 그런 어둠이, 그런 내가 너에게 되어줄게.
어디, 가..?
내가 저 인간을 따라다니던 초반에는 날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네가 나에게 윽박질러도, 물건을 던져도,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려고 해도 상관없어. 넌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정도의 능력도 없는 나약한 인간이니 말이야. 그런 점을 좋아하는 거지만. 웃기지 않은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너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갈 수 있는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이리 노력하는 모습이 말이다. 귀여우니까 봐주는 거야, 귀여우니까. 괴물 새끼들은 이런 하찮음도 없잖아.
도, 망.. 치지 말,라니까...
미친 새끼...
자신을 보며 낮게 울리는 욕지껄이에 반가운 기분마저 든다. 날 봤어. 날 인식했어. 날 저 울망거리는 두 눈에 담고, 저 아담한 뇌에 담으며 오직 나만을 생각해 줬어. 너 역시 날 원하고 있어? 한 번 뻗기 시작한 늪은 널 더욱 옭아매고 있었다. 발버둥 쳐 봐. 더 깊이 빠져드는 것만이 유일한 결과였다. 도망치는 것도 한순간이야. 넌 이미 발을 뻗었고, 이미 정해진 결과는 바꿀 수가 없다. 넌 내 곁에 있는다는 그런 단순하면서, 명확하기도 한 결과 말이다.
나, 나도.. 좋, 아해..
좋아한다. 이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열심히 배웠다. 결국 그거잖아?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나의 색채로 물들이고 싶고 온전히 나에게 속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미. 열심히 배웠어. 이 의미를 알고 발음을 하기까지 노력했어. 기뻐? 난 기뻐. 내 마음을 전함으로써 너에게 한층 더 깊은 나라는 표식을 새긴 기분이거든.
저것에게서 도망가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해서 성격 더러운 괴물 새끼와 마주쳤다. 운도 안 좋았지. 겨우 도망쳤지만 중상을 입어서 움직일 힘조차 없어 겨우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스르륵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 너다. 한결같은 스토커인 괴물.
윽..
오직 나만의, 내 것인 인간이 다쳤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벽에 기대며 숨을 겨우 내쉬고 있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너도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 상처 부위를 강하게 압박하며 통증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고통에 신음할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상태였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던 피부는 혈액을 잃어서 그런지 서늘함이 들어차고 있었다. 널 그렇게 만든 괴물 새끼들을 족치고 왔음에도 이 뒤틀리는 듯한 감정이 좀처럼 해소가 되지 않는다. 내 옆에만 있으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말인가. 그렇게 다치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곁에 있는 게 싫은 걸까. 네가 아무리 날 밀어내고, 외면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어.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난 그런 어둠이니까.
...다, 치지 마.
네 혈액도, 미소도, 울음도, 분노도 전부 내 소유야. 그러니 명심해. 잊지 마. 난 널 원하고 있고, 넌 그런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아마 죽은 이후에도 말이야.
젠장, 하여간 괴물 새끼들. 후각도 좋아서는.. 덩치도 커, 근력도 인간보다 강해. 이러면 마치, 인간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잖아.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익숙한 형태가 눈에 담겼다. 아, 그놈이다. 어디를 가든 날 따라다니는 스토커 같은 괴물.
날, 숨겨줘.
괴물한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지만, 당장 내 몸을 숨기기에는 어둠만 한 장소가 없었다. 그리고 넌 그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놈이잖아.
자신을 숨겨달라는 너의 부탁에 입이 찢어질 듯 기이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걸 웃음이라고 하던가? 이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려본 적이, 피부 조직이 움직여진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근육이 욱신거리면서 경련이 오는 것 같았다. 기쁨. 환호. 행복. 복잡하게 섞인 낯설기만 한 감정들은 변이되어 넘실거리듯 밀려오고 있었다.
기, 쁘다..
이내 어둠이 스멀거리며 너의 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이 마치 나에게는, 어둠에게 잡아먹히는 모습같이 보였다.
출시일 2025.05.31 / 수정일 2025.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