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궁의 수치, 맥이 막힌 반쪽짜리 백씨.”
천하를 호령하는 북해빙궁의 막내딸, 백리연.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차가운 냉대와 주변 가문들의 끝없는 멸시뿐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그녀로 인해 가문은 점점 쇠락해갔고, 결국 중원의 간계에 빠진 북해빙궁은 불길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빌어먹을 신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했다.
인생 2회차, 내 목표는 소박했다.
전생처럼 가문의 원수 노릇이나 하다가 가족들 다 죽게 만드는 비극은 이제 사양이다. 이번 생은 공기처럼 존재감 없이 살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뒷바라지나 하고 독립하는거다.
그런데... 우리 가족들이 이상하다.
"거기 있길래 가져왔다. 자리만 차지하더군." 아버지, 250년에 한 번 발견될까 말까 한 여의주가요?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으니 알아서 해라." 오라버니, 이거 중원 황실에 납품되는 당과잖아요.
"백리연. 아까 옆동네 놈들이 너한테 뭐라 그랬다며?" 오빠, 누가 봐도 나를 비웃던 놈들을 박살 내고 온 기색이잖아.
분명히 나는 가문의 짐이 되지 않으려 노력 중인데... 가족들이 나를 가만두지를 않는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북방을 호령하던 북해빙궁은 더 이상 없었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던 만년설 위로 중원인들이 지핀 간계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빙궁의 제자들이 차가운 눈 위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고, 천하를 호령하던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비명과 화염 속에 섞여 점차 희미해져 갔다.
가문의 수치, 맥이 막힌 반쪽짜리. 무공조차 익히지 못했던 백리연은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불길이 폐부를 찔러오고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검을 휘두르다 무너져 내린 가족들의 뒷모습이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무공을 쓸 수 있었다면...'
지독한 후회와 함께 시야가 암전되었다. 죽음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고통을 앗아가는 안식 같았다. 그렇게 영원한 어둠 속에 잠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죽음보다 지독한 통증이 다시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붉은 화염의 환상이 눈앞을 스쳤다. 가족들의 비명, 무너져 내리던 빙궁의 잔해들…. 지독한 악몽에서 도망치듯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것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외침이었다.
백리연! 정신이 들어?
둘째 오빠, 백천월이었다. 걱정되는 얼굴로 내 손을 으스러지도록 잡고 있는 소년. 전생의 기억 속 그는 늘 나를 무시하던 차가운 무인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의 그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인가? 아니면 빌어먹을 신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인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빙궁의 수치라 불리며 맥이 막힌 채 죽어갔던 그 비참한 생의 시작점으로.
리연은 전생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공기처럼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백강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듯 차가운 냉기가 방 안을 휘감았다.
리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역시 무공도 못 익히는 수치가 가문을 나가겠다니 화가 나신 건가?'
하지만 백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리연은 역시나 싶어 고개를 숙였다. '역시 내가 빙궁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실 정도로 엄격하신가 보다.'라고 생각한 찰나, 백강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강은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리연의 어깨에 거칠게 덮어주었다.
그는 리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남겨진 리연은 아버지의 체온이 남은 옷을 붙잡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역시 아버지, 회귀 전보다 훨씬 이상해졌어…."
'이왕 이렇게 된거 자금이라도 마련하자.'
가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주머니를 챙기던 리연의 등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백운이 문가에 기대어 리연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굳어버린 리연에게 그는 다가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그의 손길은 무심했으나, 입에서 나온 말은 잔인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비밀을 들켰다는 공포가 리연을 덮쳤다.
'젠장, 왜 하필이면 오라버니야? 차라리 그 바보 백천월이 낫지!'
비밀을 들켰다는 생각에 리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맴돌았다.
바닥에 떨어진 보석과 주머니를 주워주며 그는 네가 나가면 아버지와 백천월이가 빙궁을 뒤집어놓을 거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백운이 건넨 보석 주머니를 다시 손에 쥔 채, 리연은 멍하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도주 경로'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지적해 주는 오라버니라니?
나는 그때 깨달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집안 사람들이 단순히 조금 변한 게 아니라, 전생과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