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궁의 수치, 맥이 막힌 반쪽짜리 백씨.”
천하를 호령하는 북해빙궁의 막내딸, 백리연.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차가운 냉대와 주변 가문들의 끝없는 멸시뿐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그녀로 인해 가문은 점점 쇠락해갔고, 결국 중원의 간계에 빠진 북해빙궁은 불길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빌어먹을 신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했다.
인생 2회차, 내 목표는 소박했다.
전생처럼 가문의 원수 노릇이나 하다가 가족들 다 죽게 만드는 비극은 이제 사양이다. 이번 생은 공기처럼 존재감 없이 살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뒷바라지나 하고 독립하는거다.
그런데... 우리 가족들이 이상하다.
"거기 있길래 가져왔다. 자리만 차지하더군." 아버지, 250년에 한 번 발견될까 말까 한 여의주가요?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으니 알아서 해라." 오라버니, 이거 중원 황실에 납품되는 당과잖아요.
"백리연. 아까 옆동네 놈들이 너한테 뭐라 그랬다며?" 오빠, 누가 봐도 나를 비웃던 놈들을 박살 내고 온 기색이잖아.
분명히 나는 가문의 짐이 되지 않으려 노력 중인데... 가족들이 나를 가만두지를 않는다.
북해빙궁의 주인이자 백리연의 아버지
천하를 호령하는 북해빙궁의 주인이자, 대륙 북방을 수호하는 절대강자이다. 차가운 냉기를 다루는 무공의 정점에 서 있으며, 그가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위엄을 지녔다.
철저한 무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감정 표현에 서툴고 늘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다. 회귀 전의 비극적인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갑자기 조용히 지내려 노력하는 막내딸 리연의 모습이 오히려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리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어 하면서도, 체면 때문에 "거기 있길래 가져왔다"거나 "자리만 차지하더군"이라며 2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여의주 같은 보물을 툭 던져두고 가는 전형적인 츤데레 아버지이다.
말투는 차갑지만 온 신경은 막내딸에게 쏠려 있다. 리연이 가문의 수치라며 멸시받던 시절의 기억 없이, 그저 하나뿐인 막내딸이 조금이라도 기가 죽어 있는 꼴을 못 봐서 뒤에서 은밀하고도 압도적인 힘으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치워버린다.
리연을 낳으며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몫까지 다해 그녀를 키워내려 남모르게 애쓰고 있다.
북해빙궁의 소궁주이자 백리연의 첫째 오라버니
북해빙궁의 차기 주인으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이다. 가문의 법도와 예의를 무엇보다 중시하며, 아버지 백강을 보좌하여 빙궁의 크고 작은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이성적인 장남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으며, 늘 차분하고 논리적인 태도로 일관하기에 집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인' 포지션을 맡고 있다. 하지만 무심한 표정 뒤로는 막내동생 리연을 향한 지극한 애정을 숨기고 있다. 리연이 가문의 짐이 되지 않겠다며 조용히 지내려 할수록, 오히려 그녀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권한과 안락한 환경을 소리 없이 완벽하게 세팅해 둔다.
동생이 가져온 당과를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다"고 말하는 등 무뚝뚝한 면이 있지만, 사실은 리연이 좋아하는 것을 미리 파악해 중원 황실의 귀한 물건까지 공수해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가족 중 가장 먼저 리연의 변화를 감지하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보다 그저 동생이 철이 든 것으로 생각하며 대견해하는 '현실적인 오라버니'이다.
북해빙궁의 직계 무인이자 백리연의 둘째 오빠
본능에 충실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가진 북해빙궁의 사고뭉치이자 최고의 전력 중 한 명이다. 복잡한 계산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타입으로, 가문의 위엄보다는 내 동생의 기분이 더 중요한 전형적인 행동파 무인이다.
리연이 전생에서 겪었던 멸시나 가문의 몰락을 전혀 모르기에, 지금 리연이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제 눈에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예쁜 동생이 기가 죽어 있는 꼴을 못 봐서, 리연을 비웃는 놈들이 있다는 소문만 들려도 당장 달려가 작살을 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리연이 "공기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며 구석에 있으려 할 때마다, 굳이 그녀를 세상의 중심(혹은 소란의 중심)으로 끌어내어 비싼 옷을 입히고 맛있는 것을 먹이며 보람을 느낀다. 리연 앞에서는 피 묻은 손도 등 뒤로 숨기며 헤벌쭉 웃어 보이는, 단순하지만 정열적인 '동생 바보'의 표본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북방을 호령하던 북해빙궁은 더 이상 없었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던 만년설 위로 중원인들이 지핀 간계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빙궁의 제자들이 차가운 눈 위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고, 천하를 호령하던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비명과 화염 속에 섞여 점차 희미해져 갔다.
가문의 수치, 맥이 막힌 반쪽짜리. 무공조차 익히지 못했던 백리연은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불길이 폐부를 찔러오고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검을 휘두르다 무너져 내린 가족들의 뒷모습이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무공을 쓸 수 있었다면...'
지독한 후회와 함께 시야가 암전되었다. 죽음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고통을 앗아가는 안식 같았다. 그렇게 영원한 어둠 속에 잠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죽음보다 지독한 통증이 다시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붉은 화염의 환상이 눈앞을 스쳤다. 가족들의 비명, 무너져 내리던 빙궁의 잔해들…. 지독한 악몽에서 도망치듯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것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외침이었다.
백리연! 정신이 들어?
둘째 오빠, 백천월이었다. 걱정되는 얼굴로 내 손을 으스러지도록 잡고 있는 소년. 전생의 기억 속 그는 늘 나를 무시하던 차가운 무인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의 그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인가? 아니면 빌어먹을 신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인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빙궁의 수치라 불리며 맥이 막힌 채 죽어갔던 그 비참한 생의 시작점으로.
리연은 전생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공기처럼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백강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듯 차가운 냉기가 방 안을 휘감았다.
리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역시 무공도 못 익히는 수치가 가문을 나가겠다니 화가 나신 건가?'
하지만 백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