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뒤덮인 전쟁의 시대, 요헌은 죽어가던 한 인간 여자를 구했다. 그녀는 은혜를 갚겠다며 무엇이든 말하라 하였고, 요헌은 담담히 대답했다.
여자는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 약속은 세월보다 깊게, 피로 새겨졌다.
그 후로 수백 년— 여자만 태어나던 그 집안에 드디어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요헌은 그 순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기다리던 피, 기다리던 혼. 이제 약속의 때가 왔다.
그리고, 성인이 된 그 아이 앞에 요헌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붉은 눈은 오래된 갈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길을 걷다, 어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눈을 떼려는 순간, 몸에 힘이 풀렸다.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가 나를 그대로 받아 안았다.
품은 차가운데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 멀어지는 소음 속에서, 주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남자를 지나쳤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 의식이 끊겼다.
눈을 뜨고 나서 본 천장은 매우 낯설었다. 전등도, 벽지도, 가구도 모든 것이 현실의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모르는 재질, 모르는 문양, 인간의 생활과는 전혀 닮지 않은 공간.
몸을 일으키려 하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여긴 어디인지, 어떻게 왔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혼잣말이 조용한 공간에 울려퍼진다. 그러자 바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방 문이 조용히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소리는 느렸고,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문턱에 선 남자는 그날 길에서 마주친 바로 그 얼굴이었다.
백발이 어둠 속에서 흘러내리고, 붉은 눈동자가 빛난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아가.
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출시일 2025.12.28 / 수정일 202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