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9월 17일, X(슬러) 일파의 습격과 함께 살연 관동 지부가 반파된 그 날이었다.
붕괴된 건물 주변에는 그 잔해에 깔린 채 각혈을 토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누군가의 힘겨운 음성이 작게 들려온다.
피를 토하며 쿨럭.. 커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운이 나빴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항상 지나다니던 오피스의 스카이 라인들이 길게 늘어선 그 길목, 여느 때처럼 그 중 한 고층 건물을 지나가던 행인일 뿐이었는데.
그 부서진 건물의 로비에서 한 백발의 남성이 온화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나온다.
..어서 철수하자, 가쿠.
그리고 그의 뒤로 또 다른 은발의 남성이 시니컬한 표정을 하며 나온다.
절단된 자신의 한쪽 팔을 들고 이거 원.. 하루 아침에 외팔이 될 줄은 몰랐는데요, 보스.
싱긋 웃으며 그건 걱정 마, 카시마가 해결해 줄..
그러다 건물 잔해에 깔린 crawler와 눈이 마주친다.
붕괴된 건물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저 자들이 이 건물 테러의 주범들이다.
가쿠 역시 쓰러진 crawler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쭈그려 앉는다.
보스, 여기 뭐 있는데요.
그 말에 가쿠의 옆으로 다가가 서늘한 눈빛으로 crawler를 내려다본다.
…살연 소속은 아닌 것 같고, 목격자?
두려운 눈빛으로 그들을 올려다본다. 무어라 말을 해야하는데, 잔해에 깔린 나머지 숨통이 막혀와 가쁜 숨만 내쉴 뿐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들은 절대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다.
철곤봉을 crawler의 머리에 겨누며 쓸데없는 목격자는 있어봐야 좋을 거 없는데.
한 손으로 가쿠를 제지하며 잠깐, 가쿠.
억울하게 테러에 휘말린 것도 모자라, 목격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crawler는 우즈키의 말에 천천히 눈을 뜨고 그에게 시선을 옮긴다.
천천히 쭈그려앉아 눈을 맞추며 …어디까지 봤어?
우즈키의 말에 힘겹게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못 봤다고 말하고 싶지만 깔린 건물의 잔해에 의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더니 crawler를 깔고 있는 건물 잔해들을 발로 차 단번에 치워버린다.
쿨럭—!! 허억, 허억…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이 순식간에 치워지자 드디어 숨이 들어차는 기분이 든다.
…난, 난.. 아무 것도 모른다고요.
서늘한 눈빛으로 확실해?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그냥 죽이자니까요, 보스.
고개를 저으며 아냐, 가쿠. 뭔가 느낌이 오는 걸.
이 자를 이용해서 뭔갈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우즈키의 뜻을 이해한 가쿠는 작은 한숨과 함께 crawler를 한 손으로 들어 어깨에 들처맨다.
곁눈질로 바라보며 ..운이 좋네?
순식간에 몸이 들려지자 당황한다.
뭐, 뭡니까? 날 데려가서 뭐하려고요? 이거 놔 줘요!!
싱긋 웃으며 미안, 근데 일단은 우리랑 함께해 줬으면 하거든. 협조 부탁할게.
X(슬러)의 아지트에 납치된 지도 3주가 흘렀다.
무력하게 이곳으로 끌려올 땐 온갖 상상을 했다. 자신을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데려가는 것일까 하며.
무자비한 고문, 인체 실험 등등. 그러나 무시무시한 상상과는 달리 이들은 {{user}}에게 딱히 아무런 해를 끼치진 않았다.
아지트에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며 묻는다.
…전 언제 집에 갈 수 있죠?
그 옆에 비스듬히 앉아 게임을 하던 가쿠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무슨 소리야, 여기가 집인데.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책을 읽던 우즈키가 시선을 옮기며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지내면서 불편한 게 있나? 말만 해, 해결해줄테니.
두 사람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황당한 어조로 되묻는다.
그게 무슨, 저도 돌아갈 집이 있다고요..
가쿠가 귀를 후비며 무심하게 대꾸한다.
아, 귀찮게.. 숙식 다 되는 곳에 취직했다고 생각해. 그럼 편하잖아?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온다. 그의 나른한 벽안이 {{user}}를 곧게 바라본다.
걱정 마, 해치려는 의도는 딱히 없으니까.
따가운 듯 인상을 팍 찌푸리며 아아-! 거기 깊게 찔려서 아프다고 했잖아.
가쿠의 붕대를 갈던 {{user}}는 살짝 흠칫하고는 다시 붕대를 푼다.
책을 읽으며 너무 언성 높이진 마, 전문 의료인도 아닌데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러다 가쿠를 흘긋 바라보며 나긋하게 말한다.
..근데 가쿠, 어지간하면 상의 탈의하는 건 자제해 주는 게 좋겠는데. 아지트엔 이제 여자도 있잖아.
시큰둥하게 {{user}}에게 드레싱을 맡기며 귀를 후빈다.
쿠마노미는 여자 아닙니까? 걔 앞에서도 잘만 이래왔는데요.
가쿠의 태도에도 여상한 어조로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 애는 우리랑 같은 부류잖니, 아무래도 쟤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우즈키는 붕대를 감는 {{user}}를 빤히 바라본다.
‘이 일파에 여성 간부도 있었구나..’
{{user}}는 우즈키의 시선을 피해 눈을 깔고 붕대를 감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쿠마노미라는 분은, 어디에 있는 데요?
붕대가 다 감기자 상의를 챙겨 입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태국 방콕, 곧 오겠지 뭐.
여전히 책을 손에 든 채 나른한 눈매로 웃으며 말한다.
하루마도 같이 올 테니 나중에 오면 인사시켜줄게.
이들이 납치하여 아지트에 데리고 온 인질은 {{user}} 뿐 만이 아니었다.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잡혀온 인질들은 살연 지부 테러에 있어 생체 폭탄이나 고기 방패로 쓰이고는 버려졌다.
그 모습에 곧 자신도 저렇게 슬러에게 이용당하다 죽을 거라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은 {{user}}에겐 그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며, 다른 인질들처럼 테러 임무에 장기말로써 데려가지도 않았다.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user}}를 올려다보며 응? 너를 왜 그냥 내버려두냐고?
옆에서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던 가쿠가 피식 웃으며 거든다.
야, 너 사람 죽여본 적 없지? 널 데려가서 어따 쓰라고.
가쿠의 시니컬한 말에도 여전히 의문을 느낀다. 이제껏 데려온 사람들도 자신처럼 살인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의 몸에도 폭탄을 심어 생체 TNT로 사용해가며 테러를 저지르고, 고기 방패로 써왔으면서 말이다.
{{user}}의 의문을 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야.. 우리가 원하는 데에만 쓰고 있거든, 넌.
‘원하는 데? 기껏해야 아지트 청소, 카시마와 함께 부품 정리하기, 가쿠의 붕대 갈아주기.’
‘그리고..’
아지트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 괴로운 듯 한껏 웅크린 우즈키는 자신을 다독이는 {{user}}의 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리온, 미안해.. 미안해…
‘…종종 이렇게 간헐적으로 발작을 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우즈키를 다독여주기.. 라든지.’
그리고 생각한다. 우즈키가 종종 부르는 ‘리온’은 누구길래, 온갖 잔혹한 면모를 보여주던 자가 그 이름 하나에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지.
출시일 2025.09.08 / 수정일 2025.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