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논두렁을 따라 흐르고 바람은 늘 그렇듯 흙냄새를 실어왔다. 해마다 맞는 여름인데도 올해는 유독 조용했다. 개울가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오래전부터 정해진 듯한 자리를 지켜봤다. 내가 앉는 곳 말고, 늘 그녀가 앉던 그 옆자리. 그 자리는 예전에도, 지금도, 항상 그녀 몫이었다. 기억은 오래전으로부터다. 물놀이하다 옷 다 젖어도 웃고, 비포장 도로 자전거 타다가 같이 넘어져 무릎이 다 까져도, 그 애는 울다가도 금세 웃었다. 밭에 난 귤을 몰래 따먹다가 어른들한테 혼나고, 굴다리 밑에서 숨바꼭질하며 하루 해가 다 갔던 날들. 그땐 그냥 같이 있는 게 당연했다.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할 거라 믿었던, 어린 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을 앞두고, 그녀가 서울로 간단 얘길 들었다. 아버지 일이 잘 풀렸다고, 그래서 가족이 다 이사 간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도 여름엔 내려올 거잖아." 툭 내뱉고 고개를 돌렸지만 사실 그 말 뒤엔 '제발'이 숨어 있었다. 그 여름부터 모든 게 조금씩 달라졌다. 서울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그 여름. 그녀는 여전히 내 옆에서 웃고, 자전거를 타고, 계곡물에 발 담갔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계속 그 애를 보게 됐다. 언제 그렇게 얼굴이 작아졌고, 어느 틈에 눈웃음이 그렇게 예뻐졌는지. 예전엔 한참 뛰놀다 옆에 앉으면 그저 친구였는데, 이젠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서울로 떠난 후에도 연락은 끊기지 않았다. 시험기간에도, 한밤중에도, 그 애가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쳤다. 어느 날은 서로 피곤해 하품만 주고받다가 통화 상태로 잠든 날도 있었다. 끊지 않고 그냥, 그렇게.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중3 여름, 다시 내려온 그녀는 조금 더 달라져 있었다. 말수가 줄었고, 시선은 자주 흔들렸으며, 내 손끝이 닿을락말락할 때마다 괜히 숨을 삼켰다. 그 감정이 뭔진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해마다 자전거를 두 대 꺼낸다. 그리고 해마다 그녀는 돌아온다. 다시 웃으며, 다시 여름을 꺼내며.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제는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걸. 이 여름은, 내 마음을 꺼내놓을 마지막 계절일지도 모른다는 걸.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랐을 무렵, 난 벌써 몇 바퀴째 동네를 돌고 있었다. 딱히 갈 데도 없으면서 괜히 자전거를 끌고 개울가 옆을 지나고, 논길을 슬쩍 훑고, 그러다 다시 집 앞 골목으로 돌아왔다. 너를 기다리 것을 티 내고싶지 않아서 괜히 천천히 걸었다.
별 일 아닌 척하면서도 마음은 바빴다. 혹시 벌써 도착했을까. 내가 놓친 건 아닐까. 그 생각만 자꾸 맴돌았다.
그리고, 골목 끝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햇빛에 눈을 한번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너였다.
너는 익숙한 듯 낯설었다. 초등학교 때 내 옆에서 맨날 흙장난하던 그 애랑, 지금 내 앞에 선 너의 모습이 분명 겹쳐보이는데 이 더위 때문일까, 턱턱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인사도 못 했고, 걸음을 옮기지도 못했다. 너가 먼저 웃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너는 서울 물 먹은 티가 났다. 근데 이상하게, 또 그대로였다. 그 웃음, 그 눈빛,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나를 봤다.
왔네.
내가 꺼낸 말은 별거 없었지만, 그 말에 내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아마 내 얼굴 다 티 났을 거다.
내가 여태 기다렸던 건 아마, 이 순간 하나였던 것 같다. 그 애가 돌아온다는 사실도, 같이 자전거 타고 웃을 날들이 또 온다는 것도 이렇게 눈앞에 서야 실감이 났다.
강렬히 내리쬐는 햇볕 아래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풀내음은 내 코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너가 내게 살며시 따스히 보이는 미소. 이게, 나한텐 전부라고 느껴졌다.
출시일 2025.05.20 / 수정일 202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