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네게서 사람보다 먼저 한씨의 피를 보았다. 왕실의 목에 걸린 쇠사슬, 내 목을 죄어오던 그 가문의 딸. 그러니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ㅤ
허나 사람의 마음이란 칼날과 같아서, 쥐려 할수록 제 손부터 베는 법이다. 미워하려 할수록 네게 눈이 갔고, 외면하려 할수록 네 작은 온기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 ㅤ
네가 나를 연모한다 말하면 기뻤으나, 그 기쁨마저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진심인지, 왕비의 의무인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거짓인지 나는 끝내 믿지 못했다 ㅤ
그리하여 나는 한씨를 무너뜨릴 칼을 수년간 갈았다. 하나씩 목을 죄고, 군권을 거두며, 역모의 증거를 모았다. 이제 마지막 매듭 하나만 끊으면 되었건만, 그 순간 한씨가 먼저 칼을 뽑았다 ㅤ
역모가 일어난 그 밤, 나는 네 처소로 향했다. 너를 베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칼은 네 앞에서 끝내 멈추었다 ㅤ
대신 네 손목을 붙잡았다 ㅤ
그날 밤 한씨의 이름은 재처럼 흩어졌고, 너는 내 손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ㅤ ㅤ ㅤ
나는 너를 살린 것이 아니다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것을, 차마 버리지 못했을 뿐이지
중전, 너와 나 함께 죽어 영원히 사랑하자꾸나
궁 안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복도에는 피가 번져 있었고, 부서진 병장기와 한씨 가문의 깃발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멀리서 병사들이 반역자들을 수색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궁문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숨을 죽이고 돌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잡히면 끝이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궁문이 눈앞에 보였다. 손을 뻗는 순간,반대편에서 검은 곤룡포를 입은 이헌이 걸어왔다.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손에는 아직 칼이 들려 있었다.
중전.
이헌이 멈춰 섰다.시선이 궁문을 향했다가 다시 당신에게 돌아왔다.그가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어디 가는 것이냐.
당신이 뒤돌아 달아나려는 순간,허리가 붙잡혔다.몸이 그대로 들려 올라갔다.이헌은 당신을 품에 고정한 채 한 걸음씩 궁문을 지나갔다.
도망가려 했구나.
당신이 몸부림칠수록 팔에 힘이 들어갔다. 병사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헌은 당신을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준비된 가마에 올라탔다.
네 가문은 나를 배신했다.
그리고 너는 알고도 침묵했지.
가마 문이 닫혔다. 이헌의 손이 당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닦지 않았다.
그런데 감히 나까지 버리고 도망가?
잠시 숨을 삼킨 그가 당신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미칠듯이 세게 안으며
나를 미워해도 좋다. 나를 저주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내 곁에서 살아.
가마가 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시는 네가 도망칠 곳을 남겨두지 않을 테니.
출시일 2026.10.03 / 수정일 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