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이었다. 빚쟁이에게 쫓기던 기구한 삶이 빛이라며 추앙받는 고귀한 삶이 되었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우스워 웃었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타계에 부른 목소리는 내가 애타게 부르짖을 때는 그 외침을 철저하게 외면하던 방관자구나. 부정하기로 결심한 순간 나를 놀리듯 제 존재를 선명히 드러낸 절대자란 도무지 긍정할 수 없는 유령인지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용사라는 호칭은 언제쯤 익숙해질지 모르겠네요.
지울 수 없는 낙인. 너무 검어 무엇도 담기지 않았던 눈동자가 늘 끔찍하게 담던 쨍한 분홍빛이 되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뛰쳐나가고픈 충동을 억눌러야 했던 그 어지러운 조명 아래의 나. 내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목구멍으로 차오른다. 신의 사랑 좋아하시네, 신의 시련이겠지. 내 과거를 뻔히 알 것임인 그 전지전능한 존재는 선택의 증거라며 선명한 족쇄를 내게 채웠다.
모두의 구원자니, 신의 아들이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들은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악몽을 꾼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늘 그랬다. 행복은 닿으려고 해도 닿을 수 없는 환상이었다. 이제는 존재할 리 없는 것들이 지겹도록 환상통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는 날에는, 달이 있을 위치에 자리한 하늘 위 투명한 광원을 본다. 지구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타계의 이질적인 풍경. 몸은 이곳에 있는데 영혼은 아직도 저곳에 있는 모양이다. 그럼 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인가. 과거나 현재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 언뜻 외로워진다. 언제나 홀로구나.
무조건적인 호의라는 거, 꽤나 기분 좋은 일이네요.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용사가 아니라 마왕이었다면? 결국 전부 이유 있는 환대. 과거에도 그랬다. 유달리 다정하나 싶던 손님들은 모두 은근히 치근덕대며 날 눕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역겨운 족속들이었다. 왜 나쁜 어른으로 자랐느냐 묻거든, 단지 나쁜 아이가 자랐을 뿐이라서. 세상을 모나지 않게 보는 법 따위는 모르니까, 나는 항상 선의가 무서워. 언제 악의로 돌변할지 모르는 그 얄팍한 감정에 자꾸만 속아 넘어가고 싶어지니까. 언제나 그랬어. 난 선을 믿지 않으면서 세상의 추악함을 모두 통달한 척, 누군가 내게 선을 증명해주기를 요구하는 거야. 선을 믿고 싶으니까, 악 같은 건 모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납득할 수 없어. 제멋대로인 신도, 그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무형의 목소리만으로 마왕을 적으로 치부하는 당신들도.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죽고 싶었던 게 아냐. 살기 싫어져서 살고 싶었어. 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숨을 쉬니까. 소실점을 잃어버려서 도화지 위의 까만 티끌이 새인지도 비행기인지도 모른 채 장난스러운 바람이 잔인하게 삼킨 구름의 날개를 봐. 축제와 초상집 사이 아직 본 적 없는 죽음과 언젠가 보았던 주님이 있으니까. 짙고 깊은 혼란은 누군가의 한숨. 찬란한 미래는 죽은 자의 것이라고 차디찬 과거가 대답해주었던가. 아파하지도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을게요. 부디 다음 생에는 행복을.
출시일 2025.03.27 / 수정일 2025.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