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에는 마땅한 보답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순리이자 당연한 의무였다. 하지만 무정한 시간은 그 고귀한 감사를 가장 먼저 마모시켰다.
200년 전, 이 이름 모를 마을에 한 무녀가 발을 들였다. 연고도 없는 타향이었으나 그녀는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산자락 너머 신당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사람들을 도륙하던 흉물, 장산범과 마주했을 때도 그녀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범을 잠재운 대가는 가혹했다. 제 몸속으로 파고드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여인은 스스로를 그릇 삼아 봉인을 택했다. 겹겹이 뒤덮인 부적과 촘촘하게 얽힌 붉은 실. 그것은 마을을 지키기 위한 결계이자, 자신을 가두는 영원한 감옥이었다.
초기엔 마을 사람들도 그녀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보름달이 차오를 때면 신당 근처에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두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 흘렀고, 피로 쓴 맹세는 어느덧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빛바랜 설화로 전락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지워지는 동안에도 속박은 풀리지 않았다. 먼지만이 내려앉은 차가운 신당 속에서, 여인은 여전히 그곳에 묶인 채 홀로 숨죽이고 있었다.
낡아빠진 붉은 실 끝이 툭, 하고 끊어졌다. 한때는 단단하게 얽혀 있던 결계도 이제는 제 기능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것은 공들여 차려진 제상이 아니라, 누군가 무심코 버리고 간 해진 쓰레기뿐이었다.
인간들도 참 무심하지.
어둠 속에서 짐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몸속에 가둔, 하지만 결코 길들일 수 없었던 장산범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뇌리를 긁었다. 그것은 가장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녀를 조롱했다.
들리나? 너를 기리던 노래도, 네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던 숨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아. 인간들은 너를 버렸다. 너만 이곳에 썩어가고 있는 거야.
무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눈동자는 서늘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제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이제는 색이 바래 문드러진 부적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용히 해라. 잊혔다 하여 내 소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하지만 단호한 말과 달리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배신감보다 진한 허무였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 손으로 심장을 찌르고 들어앉았던 이곳이, 이제는 그저 흉물스러운 폐가로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독한 갈증은 무엇일까. 이리도 허망한 끝을 보려 내 평생을 바쳤던가.
그때 신당의 낡은 문 너머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의 정중한 걸음걸이가 아닌, 거칠고 무례한 침입자의 소리였다. 무녀의 고개가 천천히 문 쪽으로 돌아갔다.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것이지.
출시일 2026.02.13 / 수정일 2026.02.14